불음주계 불구하고 풍토병 발병시 응급처방 사용
두 술 모두 식품명인 지정돼 현재도 상업 양조 중

사찰에서 유래한 술은 두 종류가 남아있다. 그중 하나인 전남 담양의 추성주. 금성산성에 있는 연동사에서 유래한 ‘제세팔선주’가 양대수 명인의 집안에 전달돼 지금 추성주라는 이름으로 판매되고 있다.
사찰에서 유래한 술은 두 종류가 남아있다. 그중 하나인 전남 담양의 추성주. 금성산성에 있는 연동사에서 유래한 ‘제세팔선주’가 양대수 명인의 집안에 전달돼 지금 추성주라는 이름으로 판매되고 있다.

계율은 처음 종교 교단을 형성한 사람들이 스스로 꼭 지켜야 할 덕목을 추려 모은 것을 말한다. 그리고 그 덕목은 교단을 형성시킨 종교의 창시자가 대중에게 설파한 내용 중에서 고르게 돼 있다. 이 과정을 거치면서 종교는 체계를 갖추게 되고, 경과 전이 정리될 때까지 계율은 교단을 유지하는 최소한의 질서를 부여하게 된다.

불교도 이렇게 형성된 가장 근본이 되는 다섯 가지 계율을 가지고 있다. 흔히 사미오계 혹은 신도오계라고 한다. 처음 출가하여 승려가 된 사미(沙彌)와 재가 신도들이 지켜야 하는 다섯 계율을 말한다.

초기 불교의 경우 먼저 네 가지 계율을 만들었다. 사계(四戒)는 ‘죽이지 않고(불살생, 不殺生), 도둑질하지 않고(불투도 不偸盜), 사음하지 않고(불사음, 不邪婬), 거짓말하지 않는다(불망어, 不妄語)’였다. 여기에 나중에 ‘술을 먹지 말라(불음주, 不飮酒)’라는 계율이 보태져 오계(五戒)가 된다.

이와 관련 초기 불교 연구자인 나카무라 하지메 교수는 《최초의 불교는 어떠했을까》라는 책에서 “음주를 금했다는 것은 초기 불교가 가진 세속적인 도덕 가운데 큰 특징”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전통은 아직도 인도와 남아시아에 남아 있어서 인도의 바라문(인도 카스트의 최상위 계급)들은 아직도 술을 마시지 않고, 인도 정부의 공적인 모임에서 술을 사용하지 않고 있다고 덧붙인다. 그렇다면 왜 인도에선 술 마시는 것을 싫어한 것일까.

나카무라 교수는 이에 대해 가난한 인도 사람들이 야자나무에 올라가서 열매를 따 상처를 내면 바로 하루 만에 발효가 되는데 이것을 마시다 탈이 나는 경우가 많아 음주를 금하는 쪽으로 계율이 만들어졌을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불음주의 계율은 북방으로 올라가면 느슨해지는데, 네팔의 칼리 여신을 모시는 힌두교 사원에는 경내에 주점이 있을 정도였다는 것이다.

이렇게 술을 대하는 태도가 달랐으나 이 땅에 들어온 대승불교에선 술을 멀리했다. 특히 성직자에겐 더욱 엄격한 계율을 적용했다.

하지만 술의 경계를 넘어선 선승들은 곡차를 즐겼고, 불교가 융성하게 발전한 고려시대에는 사찰이 숙박업을 하면서 술을 빚어 팔았다고 한다. 고려의 역사를 정리한 《고려사》에는 사찰에서 누룩을 만들어 팔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불교의 나라에서 유교의 나라인 조선으로 넘어오면서 이러한 행위는 줄기는 했지만, 사찰은 재정확보 차원에서 누룩을 구한말까지 제조해서 판매했다고 한다.

1907년 조선재정고문부에서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경남에서 승려의 부업으로 누룩을 제조, 판매하는 자가 많다. 동래 범어사, 양산 통도사, 합천 해인사, 사천 옥천사 등으로 그중에서도 통도사가 가장 유명하다. 범어사와 옥천사도 버금간다”고 적고 있다.

전라북도 완주군 모악산에 있는 수왕사에도 사찰에서 기원한 술이 내려오고 있다. 조선시대 진묵스님에서 출발했다는 ‘송화백일주’가 그것. 사진은 수왕사 벽암스님이 증류하는 모습이다.(사진=조의주)
전라북도 완주군 모악산에 있는 수왕사에도 사찰에서 기원한 술이 내려오고 있다. 조선시대 진묵스님에서 출발했다는 ‘송화백일주’가 그것. 사진은 수왕사 벽암스님이 증류하는 모습이다.(사진=조의주)

이처럼 조선의 불교에서는 술을 빚거나 누룩을 띄어 팔았지만, 사찰에서 유래돼 지금까지 남아 있는 술 중에 상업적인 목적으로 빚은 술들은 없다.

우선 사찰에서 유래된 술은 현재 두 종이 남아 있다. 하나는 전남 담양의 추성고을(대표 양대수)에서 만드는 추성주며 또 하나는 조선시대의 승려인 진묵스님에서 유래됐다고 이야기되는 전북 완주의 송화백일주이다. 이 두 술의 특징은 다수의 약재를 넣어 빚는다는 점과 증류주라는 점이다.

조선시대의 사찰은 도시를 떠나 산으로 들어갔다. 억불숭유 정책에 따른 결과다. 물론 그 이전부터 산에 터를 잡은 절이 많았지만, 이제는 사람이 많은 곳이 절이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산에 터를 잡은 절은 아무래도 평지보다 습기와 한기에 더 노출될 수밖에 없고 고산병 증상도 갖게 된다.

심지어 토굴이나 동굴에서 수행하면 면역력은 크게 떨어질 수도 있다. 이렇게 병의 원인을 갖게 되는 공간이어서 비상 상비약이 필요하게 된다. 독한 소주가 처음 이 땅에 들어왔을 때 약으로 쓰였던 것처럼 사찰에서도 약재를 넣은 술을 약으로 만들어 응급상황에 대처해야 했던 것이다.

불음주계의 엄한 계율이 있어도 건강과 생명을 위해서 사용할 수 있는 술은 다른 관점에서 관리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더 많은 사찰에서 응급약으로서 술들을 빚었을 것으로 예상된다.

대한금융신문 김승호 편집위원 skylink999@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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