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면 소주와 약주, 막걸리까지 중탕해서 음용
목롯집에선 ‘거냉·삼취’ 등 원하는 온도로 데워줘

▲ 주전자(酒煎子)는 술이나 차를 데우거나 담아 따르는 도구다. 한자에서 그 쓰임새를 더욱 분명히하고 있는 물건이다. 사진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19세기 백자주전자이다.
▲ 주전자(酒煎子)는 술이나 차를 데우거나 담아 따르는 도구다. 한자에서 그 쓰임새를 더욱 분명히하고 있는 물건이다. 사진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19세기 백자주전자이다.

“술 잘 먹는 아버지의 딸이요, 오라비의 누이인 문의 누님은 술을 참 알맞추 데웠다. 좋은 술 구하지 말고 데기를 잘하라는 말까지 있다. 좋은 술은 알맞추 데인 것은 술 중에도 상미일 것이다. 촌집 소주잔이면 의례히 탕기 뚜껑이나 주발 뚜껑이다. 이것을 한 잔 먹어도 웬만한 주량으로는 얼근하는 법이다.”


춘원 이광수의 소설 《나-스무살고개》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소설의 발표 시점이 해방 이후이니 20세기 중반 우리는 소주를 데워 마시기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좋은 술 구하지 말고 데기를 잘하라”라는 말이 속담처럼 사용되고 있는 것을 보면, 일상적으로 자주 술을 데워 마신 것으로 보인다. 기구가 없는 선술집이나 목롯집(목로주점)에선 그냥 마셨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술을 데워 마시는 것은 단지 이 시절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목은 이색이 남긴 시에는 ‘큰아들의 집에서 금방 데운 술을 맛보다’라는 시가 있다. 이 시에서 목은은 “술맛이 좋아도 오래도록 보관하기 곤란한데/끓여 놓으면 한여름에도 상하지 않는다네”라며 “석 잔을 냉큼 들이켜니 정신이 날아갈 듯/동순과 빙어의 맛도 아마 이보단 못하리라”라고 적고 있다. 데운 술이 너무 좋아 겨울 눈 속에서 난 죽순이나 얼음을 깨고 잡은 빙어보다 맛있다고 말한다. 


이색이 살던 시대는 여말선초다. 즉 고려 때에도 술은 데워마셨고 조선시대에도 그 문화는 남아 있다. 고봉 기대승의 시에선 “데운 술로 추위를 물리치고 즐기니/세상의 일이야 바쁘건 말건”이라는 대목이 나타나고 조선 중기의 문신 김장생은 《사계전서》에서 그리고 후기의 문신 윤휴는 《백호전서》에서 제사 때 쓰는 제주의 경우 ‘겨울에는 주자의 술을 먼저 데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즉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일본주를 데워 마시던 것이 우리 술문화에 영향을 준 것이 아니라 겨울이면 우리도 약주와 소주를 따뜻하게 데워 마셔왔고, 이 문화는 해방 이후에도 계속됐다는 것을 이광수의 소설에서 확인하게 된다. 심지어 중탕도구가 없는 목롯집에서도 술을 데워 마셨다고 한다. 

▲ 겨울은 차가운 술을 마시기 보다 데워서 마시는 계절이었다. 1980년대 쇼케이스 냉장고가 일반화되기 전까지 우리는 차가운 술을 찾지 않았다. 술의 냉기를 가시게 한 ‘거냉’ 방식으로 소주를 즐길 만큼 상온의 술을 좋아했다.
▲ 겨울은 차가운 술을 마시기 보다 데워서 마시는 계절이었다. 1980년대 쇼케이스 냉장고가 일반화되기 전까지 우리는 차가운 술을 찾지 않았다. 술의 냉기를 가시게 한 ‘거냉’ 방식으로 소주를 즐길 만큼 상온의 술을 좋아했다.

김화진의 《한국의 풍토와 인물》(1973년)에 소개된 목롯집에선 손님들이 목로에 앉아 ‘거냉이요, 삼취요’하는 식으로 마시고자 하는 술의 온도를 먼저 말한다. 그러면 주모는 구기로 술단지에서 술을 따라 양푼에 붓고 이 양푼을 끓는 물에 빙빙 돌려서 그 온도를 맞춘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거냉은 냉기가 가실 정도의 음용온도를 말하며, 삼취는 세 번 입으로 호호 불어 식혀야 할 정도의 뜨거움을 말한다. 


요즘은 ‘거냉’을 냉면집에서 쓰는 용어로 알고 있다. 냉면 육수를 담을 때 얼음을 빼고 담는 것을 흔히 거냉이라고 한다. 하지만 오래전부터 거냉은 소주의 차가운 기운을 뺄 때 쓰는 단어였다.


집에서 밥을 먹을 때 반주로 증류소주를 마실 경우 밥주발의 뚜껑을 술잔으로 사용했는데, 재질이 유기든 사기든 뜨거운 밥을 덮고 있었기 때문에 충분히 온기가 남아 있었다. 따라서 이 뚜껑에 소주를 따르면 찬 기운은 사라지고 미지근해져 음용하기에 부담이 없는 상태가 된다. 음용의 편이성도 좋아지지만, 사실 이렇게 마셔야 소주의 각종 향이 살아나 맛과 향 모두를 즐길 수 있게 된다. 이렇게 소주를 주발뚜껑에 받아 마시는 것을 예전부터 ‘거냉’이라고 불러왔다.  


그런데 지금은 사케를 따뜻하게 마시는 것은 익숙하지만, 우리 술을 데워 마시는 것은 낯설게 느껴지는 시대를 살고 있다. 이유는 냉장고다. 1970년대 후반이 되면 가정용 냉장고가 빠르게 보급된다. 또한 1980년대가 되면 소주와 맥주 도매상들이 경쟁적으로 쇼케이스 냉장고를 주점에 무상대여를 해주게 된다. 차가운 맥주를 마시듯 소주도 쇼케이스에 들어간 소주를 찾게 된다.


당시 소주의 알코올 도수는 25%. 차가운 온도의 술은 알코올 도수도 잘 느끼지 못하게 한다. 그 덕분에 우리는 지금도 16.5%의 소주를 차갑게 칠링해서 마시고 있는 것이다. 

김승호 편집위원 skylink999@gmail.com

저작권자 © 대한금융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