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성북동에는 명사들이 집이 참 많다. 사진은 '문장강화'의 저자 이태준의 집이며 지금은 ‘수연산방’이라는 찻집으로 운영되고 있다.
서울 성북동에는 명사들이 집이 참 많다. 사진은 '문장강화'의 저자 이태준의 집이며 지금은 ‘수연산방’이라는 찻집으로 운영되고 있다.

우리 술 이야기를 몇 년째 쓰다 보니 필자를 주당쯤으로 아는 사람들이 참 많은 듯하다. 그러나 주당 근처에도 가지 못할 술 실력임을 여기서 밝힌다. 겨우 과맥전(過麥田, 보리밭을 지나도 취한다는 고사) 신세를 벗어났을 뿐이다.

하지만 쓰는 글이 모두 우리 한국술과 관련돼 있다 보니 필자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럴 때면 생각나는 글 선생 한 사람이 있다.

성북동에 가면 20세기 후반 서울에서 살았던 명사들의 집이 참 많다. 가까이에 산을 두고 있는 데다 도심 접근성이 워낙 좋아서 그럴 것이다. 성북동의 간송미술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는 상허 이태준(1904~?)의 집이 있다.

이태준은 대한민국 대표 글쓰기 교본이라고 할 수 있는 《문장강화》라는 책으로 유명한 작가이다. 하지만 6.25 전쟁 중에 납북돼, 한동안 그의 글을 우리는 만날 수 없었다. 덕분에 우리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은 작가이기도 하다. 그의 집은 성북동 길가에 있어 접근성이 참 좋다.

국립박물관장을 지낸 최순우 선생의 한옥과도 그리 멀지 않다. 현재 ‘수연산방’이라는 이름의 찻집으로 운영되고 있다.

작가 이태준은 술을 잘 마시지 못했다. 오죽하면 1941년에 발표한 《무서록》이라는 수필집에 술을 고민하는 자신의 이야기를 ‘민주(憫酒)’라는 제목의 수필에 담았겠는가. 여기에서의 ‘민’은 ‘민망할 민(憫)’자이다.

수필의 시작은 이렇다. 되도록 원문을 그대로 살려서 적어본다. “술을 먹지 마시오. 나를 아끼는 이들이 친절한 부탁이러라. 술을 배우시오. 이도 또한 나를 알아주는 친구들이 은근한 부탁이러라.” 술을 배우라는 친구도 있고 마시지 말라는 친구도 있는데, 모두 자신을 위한 우정어린 충고라는 것이다.

그런데 자신은 ‘과맥전’까지는 아니지만 적은 술을 마셔도 얼굴이 빨개져 벗들의 술맛까지 잃게 만드는 수준이라고 말한다. 그러니 술을 잘하지 못해 부끄러워하며 ‘민주’라는 단어를 떠올린 것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이태준이 작가로 활동하던 시절에도 상당수의 작가가 밤을 새워 통음할 정도로 서로 자신이 말술임을 자랑했다고 한다. 그의 문우들인 김상용(1902~1951), 정인택(1909~1953), 정지용(1902~1950) 같은 작가들도 그러했다고 이태준은 말한다.

덧붙여 말하기를 이태백과 도연명이나 오마 캬얌(페르시아의 시인) 등은 술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시혼을 불태웠겠냐며 술을 통해 이들은 우주를 우러러보는 망원경 같은 문학을 일구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자신의 처지를 솔직히 고백하며 그나마 당대의 문학은 근시안적이어서 자신처럼 술을 잘하지 못하는 작가에게도 기회가 주어졌다고 스스로를 위로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술에 대한 따뜻한 마음을 드러낸다. “주료(주량)은 약하나 좋은 친구가 집에 오면 드리고 싶은 것은 내 텁텁한 정보다는 한 잔 술이요. 몸이 아픈 때 약 생각나듯이 마음이 고달플 때 생각나는 것은 그대로 술이라 이만만 해도 주맹은 아닌 듯싶어라”라고 속내를 드러낸다.

술에 대한 솔직한 자기 고백을 수필을 통해 펼쳐 놓아서일까. ‘수연산방’에서는 일절 술을 취급하지 않는다. 찻집을 운영하는 주인장이 이태준의 마음을 읽어서였을 듯싶다. 작가의 손녀이니 그럴만하다. 겨울바람 찬 계절에 들려 차 한 잔 기울이기 좋은 찻집이다. 바람 없는 날이면 성북동 길은 서울의 근대성을 새삼 확인시켜주는 길이기도 하다.

김승호 편집위원 skylink999@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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