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에 담긴 이야기 보듬고 같이 살아온 나무
수령 1천년 고목부터 500년 노거수까지 다양

▲ 사찰에 가면 500~1000년 된 느티나무를 만날 수 있다. 사진은 서울 호압사의 약사전 앞에서 자라고 있는 두 그루의 느티나무다. 500년 이상된 나무로 보호수로 지정돼 있다.
▲ 사찰에 가면 500~1000년 된 느티나무를 만날 수 있다. 사진은 서울 호압사의 약사전 앞에서 자라고 있는 두 그루의 느티나무다. 500년 이상된 나무로 보호수로 지정돼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나무는 전 국민이 사랑하는 소나무다. 전체 산림의 22%에 해당한다고 한다. 하지만 보호할 가치가 있는 나무로 지정된 나무, 즉 노거수 중에서 가장 많은 나무는 느티나무다. 전국의 보호수 1만3859그루의 52.5%인 7278그루가 느티나무다. 이 정도면 눈에 띄는 노거수의 절반 이상이 느티나무라는 이야기가 된다.

그래서일까. 느티나무는 마을의 당산나무가 되어 마을의 수호신이 되어 주었으며, 한여름에는 큰 그늘을 내려줘 마을 사람들의 휴식 공간이 되어 주기도 했다. 조선시대에는 성리학의 세계관을 반영하면서 서원이나 향교에 괴목(槐木)을 심어 은행나무와 함께 유학의 상징으로 삼기도 했다. 괴목은 느티나무의 한자어이며 회화나무와 함께 학자수로 여겼다. 

느티나무가 학자수로 심어진 성리학의 공간은 율곡을 모신 파주의 자운서원과 이황의 제자 정구를 모신 회연서원, 그리고 풍기의 소수서원과 용인의 심곡서원에도 보호수로 지정된 노거수가 서원을 지키고 있다. 이들 나무의 수령은 대략 400~500년 정도 된다. 

그런데 불교의 공간에도 느티나무가 자란다. 사찰에서는 불교적 상징수인 보리수나무나 꽃을 공양하기 위한 배롱나무 등의 꽃나무를 조경수로 많이 심지만, 느티나무가 절 마당을 장악한 경우도 제법 있다. 대표적인 곳이 세종시에 있는 비암사, 천안의 성불사, 인천의 용궁사, 부산의 범어사, 서울의 호압사, 광주 원효사 등이다.

▲ 느티나무는 낮은 구릉지 및 평지에서 잘 자라는 나무다. 사진은 서울 호압사의 느티나무
▲ 느티나무는 낮은 구릉지 및 평지에서 잘 자라는 나무다. 사진은 서울 호압사의 느티나무

게다가 산속의 사찰들이어서 그런지 이 절들에 있는 느티나무의 수령도 앞서 서원들에 있는 나무들보다 많다. 비암사의 느티나무는 800년을 훌쩍 넘긴 것으로 알려져 있고 인천의 용궁사 느티나무 두 그루는 할아버지, 할머니 나무로 불리며 1000년 세월을 넘겨 현재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상태다. 천안 성불사의 나무는 800년을, 그리고 서울 호압사의 느티나무도 500년을 훌쩍 넘겼다. 

이처럼 서원의 느티나무 보다 수령이 더 된 것은 아마도 사찰을 조성하면서 원래 그 자리에 있는 느티나무를 그대로 살려서 조경했기 때문일 듯하다. 자연스레 산속에 있는 나무가 법당 앞에서 불교적 공간으로 활용된 것이다. 서울 호압사의 느티나무는 노거수답게 약사전 앞에 큰 그늘을 만들어주고, 세종시 비암사의 느티나무는 일주문과 사천왕문이 없는 이 사찰에서 그 역할을 대신해주고 있다. 

이처럼 서원의 느티나무 보다 수령이 많은 것은 아마도 사찰을 조성하면서 주변에 있는 느티나무를 그대로 살려서 조경했기 때문일 듯하다. 자연스레 산속에 있는 나무가 법당 앞에서 자라면서 불교적 공간으로 활용된 듯싶다. 세종시 비암사의 느티나무는 일주문과 사천왕문이 없는 이 사찰에서 그 역할을 대신해주고 있다. 무등산 원효사의 느티나무는 범종각 앞에 서 있는데 ‘생각하는 나무’라는 이름표가 붙어 있다. 

이 중에서 가장 많은 사연과 이야기를 담고 있는 나무는 부산 범어사의 느티나무일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은 범어사를 불태우고 느티나무를 베어 배를 만들려고 했는데, 그때 천둥과 번개가 치더니 느티나무가 쓰러졌다는 것이다. 그 주위에 있는 왜인들은 모두 죽었고, 이 나무는 이후 계속 썩어갔는데 1945년 8월 15일 해방과 함께 새로운 잎을 냈다고 한다. 즉 범어사의 느티나무는 징벌목의 대표적인 케이스가 된 것이다. 

우리는 흔히 사찰이나 궁궐의 기둥을 소나무로 쓴다고 알고 있다. 그런데 이는 조선시대 이후에 형성된 것이라고 한다. 고려 때 건축물을 조사하면 55% 정도가 느티나무로 기둥을 썼다고 한다. 이유는 느티나무가 더 견고하고 변형이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느티나무를 주로 쓰면서 기둥으로 쓸 나무가 부족해졌는지 조선시대 들어 소나무를 주로 쓰게 된다. 아마도 노거수로 성장한 나무는 마을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신성한 존재로 여겨 손을 대지 않은 탓일 것이다. 이렇게 사찰의 느티나무는 절집의 기둥으로 쓰이지는 않았지만, 세월과 함께 다양한 이야기를 담는 이야기의 보고가 돼가고 있다.


김승호 편집위원 skylink999@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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