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석식 소주 등장으로 기존 양조장 경쟁력서 밀려
누룩소주는 사라지고 흑국·신식소주 주류로 등극

▲ 일제강점기에 누룩으로 만든 소주는 사라지고 일본에서 들어온 희석식 소주와 흑국소주가 시장을 장악하게 된다. 또 쌀로 빚은 소주도 점차 사라지고 값싸게 알코올을 얻기 위해 생산비가 저렴한 당밀과 절간고구마를 이용하게 된다. 사진은 고구마를 잘라 말린 절간고구마다.
▲ 일제강점기에 누룩으로 만든 소주는 사라지고 일본에서 들어온 희석식 소주와 흑국소주가 시장을 장악하게 된다. 또 쌀로 빚은 소주도 점차 사라지고 값싸게 알코올을 얻기 위해 생산비가 저렴한 당밀과 절간고구마를 이용하게 된다. 사진은 고구마를 잘라 말린 절간고구마다.

2023년 02월 11일 13:oo 대한금융신문 애플리케이션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일본이 조선을 강제 병탄한 지 16년 만에 경복궁 근정전 앞에 조선총독부 건물이 들어섰다. 1926년, 매국노 이완용이 죽었고 창덕궁에 유폐된 듯 살아온 순종도 세상을 떠났다.

일제의 식민통치는 강화됐고, 조선의 백성들은 끝 모를 식민지 생활에 지쳐가고 있던 시절, 시인 이상화는 그해 6월 《개벽》지를 통해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는 시를 발표했다. 

“지금은 남의 땅-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로 시작된 이 시는 잘 자란 보리밭과 마른 논에 물들어가는 착한 도랑, 그리고 온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과 푸른 설움을 안고 있는 내가 땅에 내려온 봄을 만나고 있다.

하지만 그의 마음의 봄은 멀기만 하다. 그래서 시인은 “지금은-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라며 민족의 비통한 마음을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써 내려갔다. 결국 이 시는 참을 수 없는 민족적 울분을 감성의 언어로 채워 넣어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을 뛰어넘는 시로 우리 마음에 자리하게 됐다.

그런데 빼앗긴 들에만 봄이 오지 않은 것은 아니다. 우리 소주는 아예 그 빼앗긴 들에서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소주의 흑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당시 판매되던 소주는 누룩으로 빚던 ‘곡자 소주’와 1924년 등장하여 빠르게 늘어가던 ‘흑국 소주’, 그리고 1919년 인천의 조일양조가 국내 처음으로 들여온 ‘신식 소주’ 등이었다. 곡자와 흑국은 발효제를 말한다. 곡자는 전통 누룩을, 흑국은 오키나와의 아와모리 소주를 만들 때 사용하던 검은 곰팡이를 입힌 입국을 말한다.

발효제로 구분되는 이전의 소주와 달리 신식 소주는 이름부터 남달랐다. 당시 유행하던 ‘모던’이란 단어만큼 세련되게 느껴졌고, 이전의 것들과 차별하여 질적으로 더 뛰어나다는 의미를 갖게 된 다소 불손한 단어였다. 과거의 것은 낡은 것이고, 신식은 새로움을 뜻하니 자연스럽게 편가름을 할 수 있는 마법의 단어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신식 소주는 어떤 술이었을까.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기술을 이용해서 만든 술이다. 다단식 증류탑을 갖춘 연속식 증류기를 이용해 짧은 시간에 알코올 도수 95% 이상의 주정을 대량으로 생산하고, 이 주정에 마실 수 있는 적정 알코올 도수까지 물을 타서 만든 술이다. 요즘 말로 희석식 소주를 의미한다.

지금은 이 소주가 대세를 이루고 있지만, 당시로는 최신 기술로 시장을 넓혀가던 술이었다. 귀한 식량 대신 값싼 재료로 주정을 만들었기 때문에 소주의 생산단가도 획기적으로 낮출 수 있었다.

이 소주는 1926년 이후 빠르게 성장한다. 부산에 노동자 100여 명을 고용한 대형양조장이 들어선 데 이어 1922년 설립돼 곡자와 흑국으로 소주를 만들던 평양의 태평양조도 신식 소주 생산설비를 갖추고 대량 생산에 나선다. 

절간고구마(썰어 말린 고구마)와 대만산 당밀 등을 이용해서 저렴하게 생산하는 신식 소주의 등장은 우리 누룩으로 빚는 소주의 가격경쟁력을 크게 떨어뜨렸다. 이때 누룩 소주를 빚는 양조장들에 한 줄기 희망이 비친다. 흑국 소주였다. 대자본을 들여서 다단식 연속 증류기를 갖추지 않고도 발효제 하나만으로 생산비를 낮출 수 있었기 때문이다. 

흑국 소주의 등장은 기존 양조장들에 생존의 기회가 돼주었었지만, 누룩 소주를 퇴장시키는 핵심 역할을 하게 된다. 1931년까지 30% 정도 남아 있던 누룩 소주는 1934년에는 아예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더 이상 가격 경쟁에서 버텨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1927년 발표한 이상화의 시에서처럼 당시 우리의 빼앗긴 들에는 봄이 오지 않았다. 게다가 우리의 누룩 소주마저 제자리를 빼앗기고 소줏고리는 허름한 창고 한편으로 쫓겨나 천덕꾸러기가 되고 말았다.

고작 30년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 뿐인데 쌀과 누룩으로 빚던 우리 소주는 한반도에서 사라지고 희석식 소주와 흑국 소주가 주인 노릇을 하게 된다. 

김승호 편집위원 skylink999@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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