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렁탕 세 그릇으로도 살 수 없었던 일제때 맥주
1934년 삿포로·기린 영등포에 공장 설립해 생산

▲ 신미양요가 벌어지기 이틀전 인천의 하급관리인 한 조선인이 미국 군함에서 사진을 찍었다. 삼각형 로고가 선명한 ‘배스’ 맥주병을 한아름 들고 있다. 1871년에 찍은 이 사진은 한국의 맥주에 대한 첫 공식적인 자료다. 지금으로부터 150년전의 일이다. (사진= 미국 폴 게티 미술관)
▲ 신미양요가 벌어지기 이틀전 인천의 하급관리인 한 조선인이 미국 군함에서 사진을 찍었다. 삼각형 로고가 선명한 ‘배스’ 맥주병을 한아름 들고 있다. 1871년에 찍은 이 사진은 한국의 맥주에 대한 첫 공식적인 자료다. 지금으로부터 150년전의 일이다. (사진= 미국 폴 게티 미술관)

맥주는 저렴한 가격의 대중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술 중 하나지만, 이런 지위를 차지한 것은 불과 30여 년밖에 안 된 일이다. 1988년 서울올림픽이 열리기 전까지 맥주는 지금처럼 벌컥벌컥 마시던 술이 아니었다. 시계를 더 돌려보자. 맥주가 이 땅에서 생산된 것은 1934년의 일이다. 일제강점기 시절의 맥주는 무척 비싸서 극히 일부의 유한계층만이 즐길 수 있는 술이었다.

맥주가 공식적으로 이 땅에 언제 소개되었는지에 대한 기록을 찾을 수는 없지만, 남겨진 사진 한 장을 통해 적어도 이 땅에 맥주가 전해진 시기를 유추할 수는 있다. 미국과의 전쟁인 ‘신미양요’가 벌어지기 이틀 전, 인천부의 한 아전이 미국 군함에서 사진 한 장을 찍었다.

그는 삼각형 로고가 분명한 영국산 ‘배스’ 맥주병을 한아름 서양 신문지에 싸안고 있다. 스윙병의 뚜껑이 모두 열려있는 것을 보면 맥주는 빈 병이다. 이 맥주를 조선의 하급관리인 그가 마셨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우리는 1871년 5월30일, 강화도와 인천 어디쯤 정박하고 있던 미국 배에서 서양 맥주병을 들고 있는 조선의 하급관리를 사진으로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마시는 술로서 서양의 맥주가 이 땅에 들어온 것은 언제일까. 아마도 구한말일 듯하다. 1876년 강화도 조약 이후 일본은 물론 구미 각국과의 통상조약이 체결되면서 공사관과 외국인 체류인이 들어온다. 이때 이들이 마시기 위해, 그리고 교역 상품으로서 각종 술을 들어오는데, 그 흔적은 1882년 《한성순보》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수입됐다고 해서 이 술을 마음껏 사 마실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1922년 《동아일보》의 기사를 살펴보면 당시 맥주 1병의 가격은 50전이다. 그 돈이면 쌀이 두 되이며, 그 쌀이면 한 사람이 4~5일 동안 먹을 식량이라고 한다. 그래서 기사에서는 4~5일 치의 양식값을 치르면서 맥주를 사 마셔야겠냐고 계몽하고 있다.

고가의 맥주도 시간 앞에 장사가 없었던 것일까. 한해에 평균 11만 상자가 소비되는 것을 보고 일본의 삿포로맥주와 기린맥주가 지금의 영등포에 맥주 공장을 세우게 된다. 1934년의 일이다. 국내에서 맥주를 생산하게 되자 소비량은 더욱 늘었다. 그 흔적을 통계치뿐만 아니라 언론과 문학에 등장하는 맥주 또는 삐루라는 단어로도 확인할 수 있다.

백석의 시 〈동해〉(1938년)에서 우리는 ‘맥고모자를 쓰고 삐루를 미시고 거리를 거닙네’라는 구절을 만났고, 박태원의 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1934년)을 통해 구보씨와 친구가 빠(bar)에서 맥주를 마시는 장면을 만나기도 했다.

▲ 1934년 이 땅에서 처음 맥주가 생산된다. 사진은 지금의 영등포역 남쪽에 세워진 조선맥주의 영등포공장 전경을 담은 사진엽서다. 조선맥주는 삿포로맥주, 아사히맥주, 유니온맥주 등을 내는 대일본맥주의 자매회사형태로 설립된 회사다. 그리고 지금의 하이트진로가 됐다.(사진=서울아카이)
▲ 1934년 이 땅에서 처음 맥주가 생산된다. 사진은 지금의 영등포역 남쪽에 세워진 조선맥주의 영등포공장 전경을 담은 사진엽서다. 조선맥주는 삿포로맥주, 아사히맥주, 유니온맥주 등을 내는 대일본맥주의 자매회사형태로 설립된 회사다. 그리고 지금의 하이트진로가 됐다.(사진=서울아카이)

그렇다면 당시 경성의 모던뽀이들이 다녔던 카페 내지 빠의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 1929년 하반기 《동아일보》에 연재된 〈황원행〉이라는 소설에선 ‘백마정’이라는 고급카페가 등장한다.

정면에는 ‘카페 백마정’이라는 황금색 간판이 붙어 있고 붉고 푸른 유리창에는 ‘기린맥주’라는 간판이 눈부시게 돌아간다고 적혀있다. 게다가 이 백마정의 자랑거리는 1500원 상당의 ‘빅터 축음기’다. 당시 기와집 한 채 가격이 1000원이었으니 엄청난 가격의 물건이 카페에 있었던 것이다. 이곳에서 마시는 맥주의 가격은 35전이며 여급들에게 주는 팁은 가격의 10%. 즉 맥주 한 병에 3.5전의 팁을 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당시 선술집에서 마시는 막걸리 한잔의 가격이 5전이었다. 5전을 내면 너비아니 같은 안주도 하나 주었다. 게다가 설렁탕 가격은 13전이었으며 장국밥과 비빔밥은 20전이었다. 설렁탕 세 그릇 값을 치르고도 마실 수 없는 것이 카페에서 파는 맥주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1940년에 발표된 이태준의 《청춘무성》에는 맥주의 가격이 다소 올랐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맥주 두 병에 오징어 한 접시를 계산하는데 1원 80전을 낸다. 맥주 한 병이 50전 하던 것이 60전 정도로 오른 듯하다. 당시 경성의 빠에서 파는 안주 가격이 40전에서 60전 정도 하였다고 하니, 대략 산법이 맞다.

그러니 당연히 당시 보통의 사람들은 맥주를 사 마실 수 없었다. 1934년 《동아일보》의 기사를 보면 경성에서 팔린 술은 탁주가 압도적이었으며 다음이 약주, 청주, 소주 순이다.

맥주는 2000석 규모로 꼴찌를 차지한다. 이에 반해 탁주와 약주는 35배쯤 되는 6만9200석 정도가 소비됐다.

김승호 편집위원 skylink999@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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