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의종 전국퇴직금융인협회 금융시장연구원장 / 서울이코노미포럼 공동대표

금융시장은 ‘시계 제로’

지금 금융시장은 시계 제로다. 미국이 지난 1년간 8차례의 금리 인상으로 국제 금융시장의 자금 경색이 심해졌다. 실리콘밸리은행(SVB)과 시그니처은행의 파산은 금융 불안이 경제위기로 전이될 수 있음을 실감케 했다. 제롬 파월 미국 연방준비제도(Fed) 의장의 말 한마디에 세계 금융시장이 요동친다. 미국 금리의 향방은 변동성이 급격하게 높아지는 글로벌 금융시장에서 중대 변수다. 한국도 그 영향권에 놓여 있다. 

금융시장이 불안할수록 특히 필요한 게 정책금융이다. 정책금융은 정부가 정책적으로 특정 부문의 육성과 지원을 위해 선별적으로 지원하는 우대 금융을 뜻한다. 정부가 국민을 위해 시행하는 각종 사업이나 업무 방향이 정책이라면, 이런 정책 수행을 후원하기 위해 시행하는 제반 금융지원을 정책금융이라 일컫는다. 금융시장 안정과 경제위기 극복에 유효한 도구로 활용된다. 

대표적인 정책금융기관으로 대출을 지원하는 KDB산업은행, 한국수출입은행, IBK기업은행, 중소벤처기업진흥공단, 소상공인시장진흥공단, 서민금융진흥원 등이 꼽힌다. 담보력이 미약한 기업에 보증을 지원하는 신용보증기금, 기술보증기금, 지역 신용보증재단 등도 있다. 수출확대를 위한 무역금융이나 주택공급 촉진을 위한 주택금융 등도 정책금융의 범주에 속한다. 

정책금융의 주된 기능은 시장실패 보완이다. 자원 배분을 시장 기능, 이른바 ‘보이지 않은 손’에만 맡기면 정보의 불완전성과 비대칭성, 외부효과 등으로 효율적으로 이뤄지기 어렵다. 금융시장도 예외는 아니다. 시장원리에만 의존할 경우 저신용자 등 취약 부문에는 일반 금융회사가 자금지원을 꺼리게 된다. 이때 공익의 수호자인 정부가 나서 자금공급, 금리 인하, 보조금 지급 등으로 자금 흐름의 막힌 물꼬를 터줘야 한다. 

정책금융은 ‘공(空)돈’이 아닌 ‘공(公)돈’

정책금융은 순기능만 있는 게 아니다. 역기능도 있다. 정책금융 공급이 과도하거나 금리를 인위적으로 무리하게 낮추면 의도치 않은 부작용이 생길 수 있다. 금융시장에 대한 지나친 정부 개업은 시장질서를 교란할 수 있다. 심하면 금융 불안을 야기하고 금융위기까지 초래할 수 있다. 정책금융 공급 과잉은 신용 창출을 증가시켜 물가를 자극할 수 있다. 

정책금융을 ‘공(公)돈’이 아닌 ‘공(空)돈’으로 곡해하는 도덕적 해이가 발생할 수 있다. 정책자금을 받기 위해 부러 신용점수를 낮추는 방법이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공유되는 진풍경까지 벌어진다. 자금 수요가 없는 부문에 지원하면 아까운 혈세가 낭비하는 꼴이 된다. 특정 부분에 대한 금융 우대 지원은 형평성 시비를 불러일으키고 독과점 폐해로 이어질 수 있다. 정책금융 재원을 국채발행에 의존하는 경우 후세대의 상환 부담으로 돌아가는 문제점이 파생된다. 

우리나라는 정책금융 비중이 높은 편이다. 경제성장과 산업발전을 위한 정책금융의 기능과 역할이 그만큼 컸다는 얘기다. 실제로 대부분의 정책금융 제도가 소기의 효과를 거두고 있다. 저신용 취약계층에 대한 정책자금은 공급이 수요를 못 따른다. ‘소상공인·전통시장자금’은 올해 예산 8,000억 원이 1분기에 모두 소진됐다. 급전이 필요한 취약계층에 최대 100만 원을 당일 빌려주는 ‘소액생계비 대출’은 1천억 원의 조성 재원이 시행도 전에 소진이 예상된다. 

흥행이 부진한 정책금융도 있다. 코로나19 피해 자영업자와 소상공인의 이자 부담을 덜어주기 위한 ’대환대출‘은 실적이 저조하다. 고금리 대출을 저금리 대출로 바꿔주는 정책금융 상품인데도 찬밥 신세다. 지난해 9월 접수를 시작한 이 프로그램은 정부가 추가경정예산까지 편성해 목표 공급액을 9조5,000억 원으로 늘려 잡았다. 그런데 웬걸. 대대적인 홍보에도 지난해 말까지 실행된 대출금액은 2,600억 원에 불과했다. 목표 대비 3%가 채 안 된다. 

’피 같은‘ 나랏돈, 필요한 곳에 아껴 써야

소상공인과 중소기업을 위해 마련된 ’맞춤형 금융지원 프로그램‘도 실적이 신통찮다. 41조2,000억 원의 목표 가운데 지난해 말 기준 26.94% 집행에 그쳤다. 코로나 피해 자영업자·소상공인이 보유한 협약 금융회사의 대출을 차주의 상환능력 회복 속도에 맞춰 조정해 주는 ’새출발기금‘도 실효성 논란이 뜨겁다. 최대 30조 원 규모의 기금은 지난 1월 말 기준 2조 5,400억 원으로 8.47%만 집행됐다. 수요 예측 실패였다. 

정책 간 충돌도 문제다. 대환대출과 새출발가금의 실적 부진은 올해 9월 말로 종료 예정인 코로나19 피해 자영업자와 소상공인 대상 대출에 대한 ‘만기 연장 및 원리금 상환 유예’와도 무관치 않다. 차주로서는 만기 자동 연장과 원금과 이자를 내지 않아도 되는 유리한 제도가 있는 마당에 굳이 그보다 조건이 불리하고 절차가 번잡한 제도를 활용할 유인이 강할 리 없다. 

새로운 정책을 시행하면서 기존의 제도나 상품과의 관계나 영향을 꼼꼼히 따져보지 않은 결과라 할 수 있다. 금융정책을 총괄하는 콘트롤타워가 제대로 작동되지 않고 있다는 방증일 수 있다. 정부는 일마다 때마다 정책금융 상품을 잘도 만들어낸다. 하지만 일단 시행하고 나면 나 몰라라 한다. 중간평가와 사후 관리에 상대적으로 소홀한 측면을 부인하기 어렵다. 

실패가 반복돼선 안 된다. 시행착오는 멈춰야 한다. 목적이 분명하고 취지가 훌륭해도 성과를 못 내는 정책금융은 쓸모가 없다. 정책으로의 기능도 금융으로의 역할도 기대하기 힘들다. 아까운 나랏돈만 낭비할 뿐이다. 금융은 이론이 아닌 실제다. 시장실패를 보완하는 정책금융은 나라 경제와 경제주체에 희망과 용기를 불어넣는 활력소가 돼야 한다. 빠듯한 재정과 미래 세대 부담을 토대로 재원을 염출하는 정책금융인만큼 필요한 곳에 아껴 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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