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족한 식량 탓에 쌀 양조 금지, 밀가루로 대체
고소한 맛에 탄산감까지, 외려 소비자들 더 찾아

▲ 쌀로 술을 빚지 못하던 시절에는 밀막걸리가 대중적으로 소비됐다. 술의 유통도 말통 단위로 이뤄졌으며 소매점에서 판매되는 막걸리는 사진처럼 병에 채워졌다. 요즘은 PET병이 대세지만 70~80년대 초까지는 유리병이 대세였다.
▲ 쌀로 술을 빚지 못하던 시절에는 밀막걸리가 대중적으로 소비됐다. 술의 유통도 말통 단위로 이뤄졌으며 소매점에서 판매되는 막걸리는 사진처럼 병에 채워졌다. 요즘은 PET병이 대세지만 70~80년대 초까지는 유리병이 대세였다.

2023년 05월 27일 13:00 대한금융신문 애플리케이션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쌀막걸리가 대중적인 막걸리로 자리한 뒤 밀막걸리는 서서히 시장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지금은 극히 일부 양조장에서 추억을 찾는 고객들을 위해 밀막걸리를 생산하고 있다.

하지만 밀막걸리는 양조에 쌀을 이용할 수 없었던 1966년부터 쌀을 허용한 1990년까지 약 25년 동안 우리나라의 유일한 막걸리였다. 물론 중간에 2년 정도 쌀막걸리를 허용한 적은 있지만 말이다. 

밀막걸리가 20세기 후반 대한민국 막걸리를 대표하게 된 것은 부족한 식량 탓이었다. 주식으로 먹는 쌀이 부족한데 어떻게 쌀로 술을 빚어 마실 수 있느냐가 1960년대 후반 통치집단의 고민이었다.

그 결과 전국의 양조장은 하루아침에 쌀막걸리를 포기하고 밀막걸리를 빚어야 했다. 당시 양조장들은 모두가 이렇게 하면 망한다고 강하게 항의했지만, 권위주의 정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국세청의 주류연구소에선 새로운 재료로 술을 만드는 방법을 알려주기 위해 전국의 양조장을 돌아야 했다.

그런데 양조장 업계의 우려와는 달리 시장의 반응은 더 좋았다. 오히려 양조장 전성시대를 여는 효자상품이 돼주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밀조주 등을 막기 위해 세무 당국이 펼친 정책들도 기존 양조장에게 황금기를 구가할 수 있는 요인이 돼주었다.

당시의 문제는 면허기준이었다. 1960년대 초 양조 면허 기준을 완화하자 주세법 위반사례가 많이 늘어난 바 있다. 이에 따라 1966년 국세청을 재무부의 외청으로 독립시키면서 양조장 신규 면허 기준을 강화했다.

이 조치로 막걸리 시장의 진입장벽은 한없이 높아지게 된다. 또한 부실양조장을 정비한다는 명분 아래 양조장 통합작업에 들어갔다. 1962년 서울의 51개 양조장이 통합된 데 이어 1970년 부산과 인천 대구 광주 대전 등의 대도시 양조장들이 통합됐다.

그리고 3년 뒤에는 수원과 청주 전주 춘천 제주 등 도청 소재지와 울산 마산 포항 목포 등 4개 특수 공업지구 등을 비롯해 면 단위에 이르기까지 인구 분포에 맞춰 통합을 추진한다. 그 결과 1975년 4월 말 2,097개의 양조장은 1,519개로 크게 줄어들었다.

▲ 모두가 쌀막걸리에 집중할 때 충청북도 옥천에 있는 이원양조장은 밀막걸리를 고수하고 있다. 밀막걸리는 특유의 고소한 맛과 걸쭉함을 특징으로 한다. 이원양조장은 특히 시인 정지용의 시제를 술의 브랜드로 사용해서 프리미엄 밀막걸리도 생산하고 있다.
▲ 모두가 쌀막걸리에 집중할 때 충청북도 옥천에 있는 이원양조장은 밀막걸리를 고수하고 있다. 밀막걸리는 특유의 고소한 맛과 걸쭉함을 특징으로 한다. 이원양조장은 특히 시인 정지용의 시제를 술의 브랜드로 사용해서 프리미엄 밀막걸리도 생산하고 있다.

이렇게 양조장은 돈을 긁어모으며 웃음꽃을 지울 날이 없었지만, 그 술을 마시는 농민들과 도시 노동자들의 삶은 팍팍하기만 했다. 

“국수 반 사발에/막걸리로 채워진 뱃속/농자천하지대본” 신경림 시인이 1971년에 발표한 ‘오늘’이라는 제목의 시의 서두다. 1971년은 제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이 끝나는 해다. 2차 계획의 핵심 목표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식량 자급화였고 또 하나는 수출육성이었다. 식량 자급화가 최우선 순위의 국정과제였지만, 역설적이게도 농민들의 삶은 더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저곡가 정책의 희생양이 되어 도시민들을 먹여 살리는 처지로 내몰리고 말았다. 마을마다 ‘농자천하지대본’이라는 깃발을 들고 풍악을 울리며 쌀 증산에 나서지만, 노동의 대가는 도시에 양보해야 했던 시절이다.

그러니, 농민들이 마신 막걸리는 땀 흘려 노동한 그들의 시름과 한숨이 한가득 들어있는 회한 덩어리였으며, 거친 삶에 순응하듯 살아가기 위해 흘려야 했던 고통의 눈물이었다. 하필이면 밀막걸리를 만들면서 최고의 호황을 누리던 양조장의 막걸리를, 그것도 정점을 찍고 있던 시절의 막걸리를 농민들은 자신의 고달픈 현실을 잊기 위해 마셔야 했다.

면장은 곱사춤을 추고 농업지도원은 벅구(소고)라는 작은 북을 치며 징 소리, 꽹과리 소리에 맞춰 덩실거려도, 그들에게 주어진 일은 양곡 증산 목표 13.4퍼센트라는 숫자였고 70리밖에 고속도로가 들어와 있어도 뒤울안에서 새유행가를 익히는 처녀들이나 관심을 가질까? 막걸리에 취한 아낙네들과는 별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시인의 눈에는 펄럭이는 깃발 아래 온마을이 취한 ‘오늘’이 무슨 날이냐고 연신 묻는다.

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 있지만, 입으로 말할 수 없는 그들에게 이날 주어진 국수 반 사발과 막걸리는 수입산 밀가루로 만들어진 음식이다. 자신들은 허리 꼬부라지게 신새벽부터 논에 나와 벼농사를 짓는데도 말이다. 삶은 이토록 처절하게 아이러니할 뿐이었다. 

김승호 편집위원 skylink999@gmail.com

저작권자 © 대한금융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