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천변 술집 밀집됐고 술지게미 산더미
‘군칠이집’ 등 술집 수천 호, 종사원 수만 명

▲《한양 전경》 김수철이 그린 것으로 전해지는 19세기 한양의 모습이다. 정조 임금이 시를 짓게한 《성시전도》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따라서 이 그림이 정조대 이후의 한양을 제대로 보여주는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백악산 아래 있던 경복궁이 중건(1868) 되지 않은 것을 보면 그 이전의 그림임을 알 수 있다.(사진=국립중앙박물관)
▲《한양 전경》 김수철이 그린 것으로 전해지는 19세기 한양의 모습이다. 정조 임금이 시를 짓게한 《성시전도》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따라서 이 그림이 정조대 이후의 한양을 제대로 보여주는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백악산 아래 있던 경복궁이 중건(1868) 되지 않은 것을 보면 그 이전의 그림임을 알 수 있다.(사진=국립중앙박물관)

연암 박지원의 문집 《연암집》을 보면, 젊은 시절 그는 백탑파 친구들과 함께 늦은 밤 술 한잔 걸치고 운종가로 나와 종루 아래서 달빛을 밟으며 심야의 청계천을 즐기거나, 수표교에 기대어 서서 친구가 연주하는 악기 소리를 듣곤 했다. 영조 임금이 1760년 청계천을 준설한 만큼 그가 거닐었던 청계천은 요즘 모습과는 다르지만, 그 어느 때보다 깔끔하게 정리된 수변 공간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그의 친구 박제가의 눈을 빌리자면, 청계천은 술집들의 천국이었던 것 같다. 1792년 정조 임금은 한양의 저잣거리를 상세하게 묘사한 《성시전도》가 완성되자 이를 기념하기 위해 규장각 관리들에게 이 그림을 보고 시를 지으라고 숙제를 낸다.

솔직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직필을 즐겼던 박제가다. 그가 ‘성시전도’를 보고 쓴 시에는 “오리 거위 한가롭게 제멋대로 쪼아대는 개천가의 주막에는 술지게미 산더미일세”라는 대목이 들어 있다. 오리와 거위가 먹이를 쫓는 목가적인 장면에 산업 쓰레기인 술지게미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그림이다.  

왕에게 제출하는 글은 자기검열이 필수다. 심기를 불편하게 해서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으므로 스스로 단어와 표현을 거르게 된다. 그런데도 박제가는 술을 거르고 남은 지게미가 천변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아름답지 않은 모습을 솔직하게 꼬집고 있다. 

심지어 정조 임금이 숙제를 낸 시기가 음력 4월 말이다. 즉 5월 말의 날씨다. 낮은 더워서 술지게미에 남은 알코올은 계속 발효되고, 분해되지 않은 전분이 있다면 필시 썩을 것이다. 초산발효가 이뤄질 수도 있다. 즉 산더미 같은 술지게미 주변을 걷는다면 불쾌한 냄새와 벌레를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천변풍경을 담은 시 한 편을 더 살펴보자. 한양의 토박이였던 서명인의 글이다. 그의 문집 《취사당연화록》에는 다음과 같은 시가 실려 있다. 시제는 ‘저녁에 종루 거리를 지나가다 짓다’이다.
““담배사려!” 외치는 소리 끊어졌다 이어지고/행랑에는 등불 밝혀 골목길이 환하다/한가로운 네댓 사람 팔짱 끼고 말하네/“밤새 군칠이집에 술을 새로 담갔다더군.””

박지원과 박제가가 걸었던 길이다. 운종가와 종루, 그리고 청계천 어디쯤의 공간이다. 서명인은 1766년 어느 봄날, 이 길을 걸으며 군칠이집 술을 떠올렸다. 1766년이면 아직 영조의 엄한 금주령이 풀리지 않았을 때이다. 그런데 종루에서 종을 치면 잘 들릴 수 있는 거리, 청계천 어딘가에 유명한 술집이 있었다. 한창때 이 술집의 항아리는 100개가 넘었다고 한다. 나중에는 술집을 가리키는 보통명사처럼 쓰이기도 했다. 

서슬 퍼런 영조의 금주령도 시간이 흐르면서 느슨해지고, 심지어 정조의 시대에 접어들면 한양은 완전히 새로운 풍경을 보인다. 여전히 ‘금주령’을 요구하는 상소가 줄을 잇지만, 정조는 제도로 욕망을 누를 수 없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금주령을 요구하는 사람들을 현실 인식이 떨어지는 사람 취급하기도 했다. 

술 제조 금지에 관한 논란을 담은 《금양의》라는 책을 쓴 이면승은 한양성 안에 술집이 수천 호에 이르고 이 술집에서 일하는 사람이 수만 명이라고 적고 있다. 과장이 섞여 있겠지만, 상업이 발전한 한양 중심지에 많은 술집이 들어선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러니 박제가의 시에 ‘산더미 같은 술지게미’가 등장해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다. 18세기 후반의 한양과 요즘 서울은 술집이 차고 넘친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없는 것 같다.

대한금융신문 김승호 편집위원 skylink999@gmail.com

저작권자 © 대한금융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