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종 육종 30년, 양조 품종 선정 15년 만에 뿌리 내려
국내외 각종 상 휩쓸며 ‘화이트와인’ 대명사 자리 잡아

씨없는 청포도를 만들기 위해 농촌진흥청이 육종한 포도가 지금 백포도주로 만들고 있는 ‘청수’다. 사진은 충북 영동의 ‘여포와인농장’의 포도원에서 수확 직전에 찍은 ‘청수’ 모습이다.
씨없는 청포도를 만들기 위해 농촌진흥청이 육종한 포도가 지금 백포도주로 만들고 있는 ‘청수’다. 사진은 충북 영동의 ‘여포와인농장’의 포도원에서 수확 직전에 찍은 ‘청수’ 모습이다.

올해로 태어난 지 50년이 됐다. 하지만 20년 동안 변변한 이름도 없이 숫자로 불렸다. 이름이 없다는 것은 이 세계에선 언제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다는 뜻이다. 다행히도 4년간 진행된 지역적응시험을 통과했다. 30년 전인 1993년의 일이다. 이때 가진 이름이 ‘청수’다. 그리고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지만, 청수는 국산 화이트와인 품종의 대명사가 됐다.

하나의 품종이 육종돼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이 시간을 버텼다고 모두 이름을 가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까다로운 육종과정의 여러 기준을 통과해야만 가능하다. ‘청수’는 포도로서의 가능성을 확인받고 세상에 발표된 것이다. 

하지만 ‘청수’가 걸어온 길이 꽃길은 아니었다. 외려 15년 동안 ‘청수’는 천덕꾸러기처럼 ‘미운 오리 새끼’의 길을 걸어야 했다. 이유는 식용포도로서 치명적인 단점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씨 없는 청포도가 필요했다. 식감도 좋았고 열대과일의 향도 만족스러웠다. 그런데 포도가 익는 수확기(9월)가 되면 포도알 떨어짐 현상이 너무 심했다. 상품으로 팔려나가야 하는 시점에 상품성이 곤두박질쳤으니 어느 농가가 좋아했겠는가. 농민들이 하나둘 외면하기 시작했다. 이름값도 못 하고 기억에서 잊힌 존재가 돼갔다. 


와인으로서의 가능성


다시 길이 열린 것은 ‘청수’를 육종한 농촌진흥청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면서부터다. ‘청수’는 우리가 흔히 식용으로 먹는 흑포도인 ‘캠벨얼리’처럼 추위를 잘 견디고, 질병에도 강했으며, 수세가 강해 포도송이도 많이 달렸다. ‘농진청 사람’들은 풍성한 수확이 가능한 이 품종이 사라지는 것을 바라볼 수만은 없었다.

출발점은 정석태 박사였다. 일본 파견 근무를 마치고 돌아온 정 박사는 ‘청수’ 품종의 양조가능성을 타진한다. 2006년부터 3년 동안 수확시기를 달리하며 여러 차례 시험 양조를 했다. 주위 사람들은 물론 소믈리에 등 전문가를 불러 시음회도 열었다. 의외의 성과였다.

만들어진 포도주는 와인 맛의 뼈대라고 할 수 있는 신맛이 중심을 잡으면서 와인에 영혼을 불어넣는 열대과일의 ‘향’이 그윽한 술이었다. 이렇게 ‘청수’는 세상에 두 번 태어났다. 한-칠레 자유무역협정이 체결된 지 4년이 지난 2008년의 일이다. 

하지만 이것 역시 가능성이 주어진 것이지, 포도로서 명성을 얻게 된 것은 아니다. 결국 농진청의 박사들이 두 손을 걷어붙이고 포도원과 와이너리를 겸한 곳들을 돌면서 세일즈에 나섰다. 농진청이 개발한 포도주 양조 기술도 이전하면서 ‘청수’ 살리기 프로젝트를 진행한 것이다. 


상업양조의 가능성


처음 ‘청수’를 받아들인 곳은 경북 영주의 ‘주네뜨’와 경북 영천의 ‘조흔’ 등의 와이너리였다. 생소한 품종을 시범 양조하면서 가능성을 확인했지만, 몇 년 동안은 큰 성과가 없었다. 즉 아직 ‘백조’가 되지 못했다는 뜻이다. 

2008년 양조용 포도로 재선정된 이후 기사회생한 ‘청수’는 지난해 대략 24개 와이너리에서 포도주로 만들어졌다. 이후 충북 영동의 율와이너리 ‘율화이트 드라이 13’, 마미농장 ‘어미실화이트’, 경북 경주 예인화원 ‘골든타임’ 등 추가돼 대략 27곳의 양조장에서 30여 개 이상의 제품으로 만들어지고 있다.
2008년 양조용 포도로 재선정된 이후 기사회생한 ‘청수’는 지난해 대략 24개 와이너리에서 포도주로 만들어졌다. 이후 충북 영동의 율와이너리 ‘율화이트 드라이 13’, 마미농장 ‘어미실화이트’, 경북 경주 예인화원 ‘골든타임’ 등 추가돼 대략 27곳의 양조장에서 30여 개 이상의 제품으로 만들어지고 있다.

2009년부터 일반에 보급했던 ‘청수’는 조금씩 이름을 알려갔다. 하지만 속도는 더뎌서 2015년까지 ‘청수’를 재배하면서 양조까지 하는 곳은 6~7곳 정도에 불과했다. 농진청에선 품종에 대해 열심히 알리고 언론을 통해 기사로도 연결했지만, 생산자의 반응은 생각만큼 뜨겁지 않았다. 

그래도 변신의 기회는 조용히 찾아오고 있었다. 2016년 광명동굴에서 첫 시음회가 열렸다. 6개 와이너리의 ‘청수’ 포도주와 외국산 샤르도네 품종을 비교하는 행사였다. 물론 블라인드였다. 전문가들의 평가가 너무 좋았다. 시음회를 거듭할수록 술에 대한 평가는 더 긍정적이었다.

당시 광명동굴 운영자였던 최정욱와인연구소 소장인 최정욱 소믈리에는 “행사에서 만난 포도주들의 풍미와 구조감에 깜짝 놀랐다”며 “양조방식의 차이에 따라 여러 얼굴을 보여줄 수 있는 매력적인 품종이 되리라 생각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처음 시험양조를 했던 정석태 박사가 “남다르게 느껴지는 청수의 향기에서 가능성을 찾았다”는 직감은 이렇게 하나씩 현실에서 확인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분기점은 2016년에 찾아왔다. 경기도 안산 대부도에서 농민 31명이 모여 협동조합을 구성하고 포도원과 와이너리를 운영하고 있는 ‘그린영농조합’에서 처음 생산한 ‘청수’ 포도주가 농림부에서 주관하는 ‘우리술품평회’에서 과실주 부문 최우수상을 받았다.

그리고 이듬해 경북 영천의 ‘고도리와이너리’에서 우수상을 받은 뒤 거의 매해 상을 받는 포도 품종이 됐다. 특히 충북 영동 ‘불휘농장’의 ‘시나브로 청수 화이트’와 경기도 안산 ‘그린영농조합’의 ‘그랑꼬또 화이트와인’은 최우수상과 대상 등을 연거푸 수상하면서 화이트와인의 명가로 자리잡는다.

불휘농장은 최우수상만 4번, 그린영농조합은 대상과 최우수상 1번, 그리고 2번의 우수상을 수상했다. 이것이 분기점이 됐는지 현재 ‘청수’ 품종으로 양조에 나선 와이너리 숫자는 25곳 이상으로 늘었다. 


‘청수’의 성공요인은


이 밖에도 ‘청수’는 국내외에서 다양한 상을 받고 있다. 하지만 전체 재배면적에서 청수가 차지하는 비율은 아주 미미하다. 워낙 많은 농가가 환금성을 중심에 두고 품종을 선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청수’는 식용이 아닌 양조용으로 유일하게 재배되고 있으며, 국내에서 육종한 포도 중에 유일하게 상업적인 가능성을 확인시켜준 포도 품종이기도 하다. 

당시 연구자들이 포기했다면 ‘미운 오리 새끼’로 끝났을 운명이었지만, 지금은 비상하는 ‘백조’가 되기 위해 물밑에서 부지런히 발을 움직이는 품종이 되었다. 그렇다면 ‘청수’의 성공요인은 무엇일까.

정석태 박사는 ‘품종’을 먼저 꼽는다. 그리고 둘째가 양조자의 기술, 셋째가 효모와 테루아라고 답한다.

‘청수’ 품종 개발에 참여했던 허윤영 박사도 같은 이야기를 건넨다. 그가 보내준 청수 관련 자료에는 동결착즙을 통해 와인을 만드는 방법, 아황산 무첨가 양조법 등을 양조장 기술이전하는 과정도 나오지만, 맛있는 ‘청수’ 포도주 양조의 핵심은 ‘청수’의 결정적 매력인 신맛과 향기 성분을 같이 잡을 수 있는 수확의 적기에 관한 내용이었다. “당도는 17브릭스 이상, 산함량은 0.7% 일 때 수확하는 것”이 생명이라는 것이었다. 

수확은 농부의 몫이다. 바람과 비와 햇볕, 그리고 익어가는 포도알의 색깔을 보면서 결정하는 그 결정적 시기를 이제는 많은 양조자가 찾아내고 있다. 


떡잎부터 달랐던 ‘청수’


‘청수’ 품종의 목표는 식용 가능한 씨없는 청포도였다. 그래서 프랑스에서 육종한 ‘시벨9110’을 모본으로 삼고, 씨없는 ‘힘로드 씨들리스’를 부본으로 해서 얻어낸 품종이다. 그런데 ‘시벨9110’은 우리에게 그리 낯선 품종이 아니다. 특히 국산 포도주 1세대를 기억하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시벨9110’은 계통번호다. 프랑스에서 이 포도에 붙인 품종명은 ‘베르데레’다. 농진청의 원예연구소(지금의 국립원예특작과학원)에서 1972년 선발한 품종이다. 그리고 바로 상업화돼 1974년부터 1980년대까지 국산 포도주 1차 전성기를 풍미했던 포도다. 해태주조에서 양조했던 ‘노블와인’ 그리고 동양맥주에서 생산했던 초기의 ‘마주앙’ 화이트에 이 품종이 사용됐다. 이렇게 한 시대를 풍미했던 품종이 ‘시벨9110’이다. 이 품종을 모본으로 ‘청수’가 탄생했다.

김승호 편집위원 skylink999@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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