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에 꽃피고, 초여름에 검은 열매 맺는 식물
사시사철 푸르러 꽃말은 ‘한결같은 마음’ 상징

남부 지방에서 송악은 ‘담장나무’라고 불릴 만큼 담장에서 많이 볼 수 있다. 햇볕을 받을 수 있는 곳이라면 바위와 절벽을 가리지 않는다. 그 모습이 산을 오르는 호랑이처럼 보인다고 해서 ‘파산호’라고도 부른다.
남부 지방에서 송악은 ‘담장나무’라고 불릴 만큼 담장에서 많이 볼 수 있다. 햇볕을 받을 수 있는 곳이라면 바위와 절벽을 가리지 않는다. 그 모습이 산을 오르는 호랑이처럼 보인다고 해서 ‘파산호’라고도 부른다.

섬세하고 강렬한 ‘자화상’으로 유명한 공재 유두서의 그림 중에 〈수하한일도(樹下開日圖)〉가 있다. 고목 나무 아래 한 농부가 모자를 벗고 한가롭게 쉬고 있다. 멀리 두 마리의 새가 날아가고, 비가 그쳤는지 입고 있던 도롱이는 돗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옷 단속을 부실하게 한 것을 보면 춥지 않은 계절 같지만, 농부의 뒤에 우뚝 솟은 나무는 잎을 다 떨구고 있어 겨울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아름드리나무를 동여매듯 감고 올라간 상록의 식물 하나가 있다. 잎의 모양새는 담쟁이와 비슷하다. 그런데 겨울에 푸른 잎을 달고 있으니 담쟁이는 아니다. 그렇다면 남부 지방에서 주로 자라는 ‘송악’이다. 

추운 겨울을 싫어하는 송악은 사철 푸른 난대성 식물이다. 남쪽 섬 지방과 서남해안을 따라 주로 자란다. 이 나무의 북방 한계선은 전북 고창쯤으로 여기지만, 기후변화로 서해안을 따라 좀 더 북쪽에서도 목격된다고 한다.
 
〈수하한일도〉의 주인공 농부는 편안하게 먼 곳을 바라보고 있다. 윤두서는 1713년 해남으로 낙향했다. 따라서 이 그림은 고향에 내려가 그렸을 것이다. 그런데 공재 고택은 해남의 서쪽 끝(백포마을)에 있다. 녹우당(윤선도 고택)에서 좀 떨어진 곳이다. 하지만 녹우당이든 공재 고택이든 고개를 돌리면 두륜산을 볼 수 있다. 즉 그림 속의 산은 두륜산을 표현했거나, 아니면 두륜산의 어느 바위에서 그림의 모티브를 잡았을 수도 있다. 물론 남종화풍으로 그렸으니 상상 속의 산의 모습일 수도 있다.

송악은 사철 푸르른 난대성 식물이다. 주로 남쪽의 해안과 도서지역에서 자란다. 사진은 여수 향일암에 있는 송악으로 꽃이 폈다가 지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
송악은 사철 푸르른 난대성 식물이다. 주로 남쪽의 해안과 도서지역에서 자란다. 사진은 여수 향일암에 있는 송악으로 꽃이 폈다가 지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

이와 함께 윤두서는 평소 자주 보는 식물을 자신의 그림에 담았을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송악에게 몸을 내준 나무는 바닷가를 좋아하는 팽나무가 아닐까 싶다. 즉 자신의 마음을 담아내고자 일상에서 자주 보는 산, 그리고 팽나무와 송악을 소재로 가져왔을 것이다. 게다가 겨울이라 잎을 모두 떨구고 있는 팽나무보다 사철 푸르름을 유지하는 송악을 농부와 함께 그림의 중심에 배치한 것도 같은 이치로 보인다. 이처럼 상록의 기풍을 유지하려면 햇볕을 잘 받는 곳에 있어야 한다. 하지만 송악은 다른 나무와 햇빛 경쟁을 할 수 없다. 공재의 그림에서처럼 스스로 우뚝 설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른 나무에 의지하거나 양지바른 바위나 절벽, 그리고 장애물이 하나도 없는 시골집 담장에서 주로 자란다. 덩굴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은 공기뿌리의 일종인 부착근(附着根)이 의지할 수 있는 생명체나 물체에 나무를 고정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 때문에 가능하다.
 
송악의 다른 이름은 담장나무다. 또한 남쪽 지방에서는 소가 잘 먹는다고 해서 ‘소밥나무’라고도 부른다. 이와 함께 바위나 절벽에서 자라는 모습에 빗대 ‘파산호(爬山虎)’라는 이름도 가지고 있다. ‘산을 오르는 호랑이’라는 뜻처럼 덩굴이 자라는 모습을 그리 표현한 듯하다.
 
송악은 서남부 해안지방에서 자라는 나무들처럼 잎이 윤기가 나며 짙은 녹색을 띤다. 갸름한 달걀 모양이며 꽃은 늦은 가을에 녹황색으로 핀다. 이 꽃은 우산 모양의 꽃차례에 많은 꽃이 모여 있고, 늦가을부터 꽃은 열매로 익어간다. 둥근 열매는 다음 해 봄이 되어야 검게 익는다.

송악을 제대로 만나려면 남쪽 여행을 가야 한다. 가장 대표적인 장소는 전북 고창 삼인리에 있는 천연기념물 송악이다. 하지만 멀리 떨어져 있어 나무의 생김새나 식생을 관찰할 수는 없다.

가까이에서 송악을 보고 싶다면 남도 여행길에서 만나는 담장을 잘 관찰하면 된다. 해남의 녹우당을 가도 담장을 채우고 있는 송악을 볼 수 있으며, 여수 돌산도 끝자락 금오산 남쪽에 자리한 향일암에서도 만날 수 있다.

필자는 지난 초겨울, 여수 향일암을 방문해서 송악 꽃의 끝물을 볼 수 있었다. 잎은 다 졌지만, 암술과 수술이 온전히 남은 꽃이 송악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바위 끝에 지은 향일암의 공간배치에 놀라면서 늘 푸른 나무들의 향연을 즐기는 것은 분명 여행이 주는 묘미일 것이다. 그리고 고창 선운사 동구 근처에서 봤던 송악을 눈앞에 두고 본다는 것 또한 즐거움의 하나다. 송악의 꽃말은 ‘한결같은 마음’이다. 어쩌면 송악이 자라고 있는 공간과 가장 잘 어울리는 식물일지도 모르겠다.

 김승호 편집위원 skylink999@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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