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작스런 방문에도 사랑방 내주며 술상 받아줘
가문의 술, 세상에 내기 위해 다양한 술 준비중

‘접빈객’은 우리 ‘가양주’ 문화의 한축이다. 경북 안동에 있는 학봉종가에서 그 문화를 체험했다. 사진은 종가를 지키는 종손(김종길)과 종부(이점숙)의 모습이다.
‘접빈객’은 우리 ‘가양주’ 문화의 한축이다. 경북 안동에 있는 학봉종가에서 그 문화를 체험했다. 사진은 종가를 지키는 종손(김종길)과 종부(이점숙)의 모습이다.

사전에 약속도 없이 다른 이의 집을 찾는 것은 무척이나 큰 결례다. ‘안동의 술’을 취재하는 과정에서 본의 아니게 무례를 범하고 말았다. 이 글을 통해 필자의 예의 없음을 고백하는 까닭은 자상하고 살뜰히 챙겨 준 종손과 종부의 얼굴이 아른거리기 때문이다. 여든 네댓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현역으로 집안을 찾는 손님들을 일일이 살피는 그분들의 섬세함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도시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생경한 풍경이 자아낸 감정일 것이다. 

종택은 한 집안의 장손이 중심이 되어 지켜나가는 가족의 생활 터전이자 문화공간이다. 제사와 손님 치르기가 일년내내 그치지 않는 한 종택에서 필자는 우연히 우리 술이 지닌 매력 하나를 제대로 체험했다.
 
종가의 술을 만난 과정은 이렇게 시작됐다. 안동에 있는 증류소 한 곳(안동디스트럴리)의 취재가 끝나갈 무렵, 인터뷰 자리에 동석한 안동의 종부(간재종가) 한 분이 차로 2분 거리에 있는 종가에 맛있는 술이 있다고 했다.

결국 증류소 대표를 앞세워 안동 금계리에 있는 학봉종택을 찾았다. 학봉종택은 조선 선조 때의 문신 학봉 김성일의 종가이다. 학봉 김성일은 서애 류성룡과 함께 퇴계 학맥을 잇는 거유(巨儒)로 추앙받고 있으며, 독립운동사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고 평가받을 만큼 집안에는 열일곱 분의 독립유공자가 있는 가문이기도 하다.

학봉종가의 손님맞이 술상이다. 손수 만든 다과와 함께 나온 종가의 술은 산미와 감미가 어우러지는 삼해주였다. 종부는 이 술을 세상에 내놓으려 준비 중이다. 
학봉종가의 손님맞이 술상이다. 손수 만든 다과와 함께 나온 종가의 술은 산미와 감미가 어우러지는 삼해주였다. 종부는 이 술을 세상에 내놓으려 준비 중이다. 

매서운 겨울 날씨에도 불구하고 반듯하게 정리된 종가는 햇볕을 가득 담고 있어서인지 포근하기만 하다. 갑작스러운 연락에도 김종길 15대 종손은 문 앞에서 일행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이점숙 종부는 방으로 우리를 안내하고 간단한 안주와 이날의 주인공인 술을 내주었다. 동행한 안동디스트럴리 신형서 대표, 간재종가의 종손과 종부, 그리고 필자 부부는 이렇게 ‘봉제사접빈객’의 주인공인 학봉종가의 ’가양주‘를 만나게 되었다.
 
오는 손님을 대접하는 ‘접빈객’ 문화는 현대인의 사고에선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은 고단한 과정이다. 하지만 종손과 종부는 귀찮은 기색 없이 종택을 찾아온 일행에게 다과와 술상을 받아줬다. 또 같은 시간대에 집안을 찾은 다른 일행에게도 소홀하지 않게 손님맞이에 나서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이날 사랑채에는 안동시장 일행이 또 다른 손님으로 오갔다.

이점숙 종부의 어머니는 퇴계종가의 종부였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술빚는 것은 물론 누룩을 딛는 것까지 어깨너머로 봐왔다고 한다. 하지만 의성김씨 집안으로 시집왔을 때는 가양주를 빚을 수 없었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각종 제례 때 쓰는 술은 직접 빚은 술이 아니라 양조장에서 만든 술이었다.
  
그러다 90년대 후반 가양주가 가능해지면서 집에서 쓰는 술을 빚기 위해 전통주연구소를 찾아가 술을 배웠다고 한다. 본격적으로 가양주를 빚기 시작한 것은 안동시에서 ‘종가의 술’ 복원에 관심을 두기 시작하면서부터다. 처음에는 제사음식으로 쓰고 있는 ‘마’를 주제로 술을 빚기도 했다. 

이날 맛본 술은 ‘삼해주’였다. 돼지날(亥日)마다 덧술을 두 번 한 삼양주다. 그런데 술을 빚은 계절이 여름의 한복판인 8월인지라 술은 산미를 갖게 됐다. 종부의 입에 거북한 산미였던지 소주를 내릴까 생각했다고 한다. 하지만 양이 많지 않아 증류되지 않았고, 운좋게 우리 일행은 시음의 기회를 얻은 것이다. 저온 창고에서 4개월가량 숙성된 술이니 산미와 감미가 제대로 균형을 이루고 있다. 술잔을 입에 댄 순간은 물론 목넘김 이후에도 입안에는 매력적인 초여름 과일 향이 남는다.

이 술에 맞춰 종부는 직접 만든 육포와 어포, 그리고 인절미 등의 음식을 연신 권한다. 심지어 운전을 핑계로 술을 마시지 않는 필자를 위해 병목까지 가득 채운 술병 하나를 준비해 챙겨줬다.
  
서울로 올라가는 귀갓길을 재촉하는 필자에게 대문을 나서던 김종길 종손은 학봉종가의 이야기를 담은 책자와 DVD를 건네줬다. 배웅에 나선 종손과 종부는 마지막 길손이 떠나고 나서야 집안으로 들어간다. 겨울, 서쪽으로 지는 해는 사랑채를 가득 채우고 있고, 종택에도 어둠이 깃든다. 하지만 손님을 맞이하는 종가의 풍습은 여전히 훈기가 가득하다.

김승호 편집위원 skylink999@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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