털진달래·사스래나무·눈잣나무와 경쟁하며 산정 지켜
기후변화 직격탄 맞아 1,000m 지대서도 고사목 신세

오색 약수에서 설악산 대청봉을 오르다보면 정상부에서 중청이 보이기 시작한다. 사진은 중청의 눈 덮인 서쪽 사면이며 ‘분비나무’가 푸르름을 자랑하듯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오색 약수에서 설악산 대청봉을 오르다보면 정상부에서 중청이 보이기 시작한다. 사진은 중청의 눈 덮인 서쪽 사면이며 ‘분비나무’가 푸르름을 자랑하듯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2월 들어 설악산이 무척 성이 났는지 좀처럼 속살을 보여주지 않는다.

연이어 폭설이 내렸기 때문이다. 오색 약수에서 대청봉까지, 그리고 천불동을 거쳐 소공원으로 가는 길과 봉정암을 거쳐 백담사로 하산하는 길만 겨우 열렸다. 공룡능선이나 서북주능선은 아예 발을 디딜 수 없을 만큼 눈 속에 파묻혀 있다.

설악은 모든 계절이 다 볼거리이지만, 이름에서 알 수 있듯 겨울 설악은 눈 내린 풍경이 장관이다. 산속에 들어와 산을 보는 것도 좋지만 산밖에서 눈 덮인 산의 능선과 골짜기를 보고 있으면, 눈길 가는 곳 모두가 다 진경산수화가 된다. 설악산이 그렇다.

설악산 대청봉에서 바라본 화채능선이다.
설악산 대청봉에서 바라본 화채능선이다.

겨울 설악산이 돋보이는 이유는 물론 거대한 육산과 암릉, 그것도 기암괴석의 암릉이 연출하는 산세 덕분이다. 하지만 이것이 다는 아니다. 설악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식물들도 한몫한다.

오색 분소(남설악탐방지원센터)에서 대청봉으로 오르는 길은 5km 정도 되는 매우 가파른 길이다. 그래서 오르다 보면 주변 산세를 살필 틈도 주어지지 않는다.

다행히 해발 1,000m가 넘어서면 주변 경치가 보이기 시작한다. 몸이 어느 정도 산에 적응한데다, 능선이 펼쳐지면서 주변 조망이 쉬워진 탓도 있다.

그래도 거친 호흡은 멈출 줄 모르고 시선은 주변보다 발끝을 바라보게 된다. 그러다 마중 나온 칼바람을 만나면 정상이 가까워진 것을 몸으로 느끼게 된다.

대청봉 표지석에서 서북능선을 바라본 장면이다.
대청봉 표지석에서 서북능선을 바라본 장면이다.

이제 진짜 설악의 풍경을 만날 때다. 붉은색의 ‘대청봉’ 표지석 뒤로 도열하고 있는 중청과 서북능선, 공룡능선과 마등령 및 황철봉은 모두 ‘설국’이 돼 있다.

여기서 잠시 눈을 돌리면 설악의 새로운 그림 하나를 만나게 된다. 물론 나무에 관심이 있어야 보이는 그림이다. 대청봉 정상에서 중청을 바라보면 경사면에 우뚝 솟아 있는 ‘분비나무’들을 발견할 수 있다.

사실 이 나무는 해발 1,000m를 넘어서는 순간부터 계속 마주친 나무다. 키 작은 털진달래와 잔뜩 움츠리고 있는 눈잣나무, 그리고 바람에 따라 휘어있는 사스래나무까지 설악의 고산부는 추운 날씨와 바람을 견뎌내며 살아온 이 나무들이 주인인 셈이다.

이 중에서 분비나무는 겨울 설악, 특히 대청봉과 중청, 그리고 귀때기청봉으로 이어지는 서북주능선을 따라 뚜렷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잎 넓은 나무들은 모두 잎을 떨군 상황에서 상록의 분비나무만이 짙은 청색을 발하고 있으니 어찌 눈에 들어오지 않겠는가. 《논어》의 ‘자한편’에 나오는 ‘세한연후 지송백지후조야(歲寒然後 知松柏之後彫也)’의 구절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풍경이다.

‘날이 추워져야 비로소 소나무와 잣나무의 아름다움을 알 수 있다’는 이 구절은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를 통해 일반에 널리 알려져 있다.

그렇다. 소나무와 잣나무는 물론 설악산 서북능선의 주인공인 분비나무나 한라산 정상에서 눈맞으며 자라는 구상나무도 모두 겨울이 돼야 진가를 드러낸다.

소백산 이북의 고도 1000미터 이상의 지역에서 볼 수 있는 분비나무 사진이다. 왼쪽은 기후변화로 고사한 나무다. 분비나무를 포함한 많은 침엽수들이 멸종위기에 내몰리고 있다.
소백산 이북의 고도 1000미터 이상의 지역에서 볼 수 있는 분비나무 사진이다. 왼쪽은 기후변화로 고사한 나무다. 분비나무를 포함한 많은 침엽수들이 멸종위기에 내몰리고 있다.

그런데 불행히도 잎 가는 침엽수들이 기후변화라는 대변동의 시대를 힘들게 버티면서 살아가고 있다고 한다. 한반도에 자생하는 28종의 침엽수 중에 19종이 멸종위기종이다. 그리고 설악산 대청봉에서 만난 ‘분비나무’도 같은 운명에 놓여 있다고 한다. 산을 오르면서 만났던 고사목들이 그 증거다.

분비나무는 추운 날씨를 좋아하는 한대성 식물이다. 그래서 북위 35도 이북의 해발 1,000m가 넘는 지역에서만 만날 수 있다.

그리고 분비나무와 친연관계에 있는 구상나무는 덕유산과 지리산, 한라산의 고산지역에서 볼 수 있다. 그런데 두 나무 모두 같은 처지에 놓여 있다.

설악산 대청봉을 오른 지난 주말, 중청봉의 서쪽 사면에는 분비나무들이 흩어져 산을 오르는 모양새로 푸르름을 자랑하고 있었지만, 그 사이사이에 죽어서 고사목이 된 나무들도 비슷한 숫자로 보였다. 기후변화가 직접적인 이유라고 한다. 모두가 같은 마음을 갖지 않으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다 보니 안타깝기만 하다.

백두대간의 산을 오를 때마다 마주치는 침엽수에 애정어린 눈길을 주자. 뿌리 하나라도 밟지 않으려는 노력과 함께 말이다.

김승호 편집위원 skylink999@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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