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금융신문=임유 편집위원> 헌법 38조는 ‘모든 국민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납세의 의무를 진다’고 규정하고 있다. 모름지기 국민으로서의 권리를 누리려면 합당한 세금을 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현실은 세금을 덜 내는(혹은 안 내는) 사람들이 오히려 큰소리치는 세상이다. 오죽했으면 헌법 조항을 제목으로(38사기동대) 달고 체납 세금을 불법적으로 징수하는 드라마가 나왔겠는가. 아무튼.

우리나라는 납세자 스스로 과세요건의 충족 여부를 조사 확인하고 세액(금)을 신고하는 ‘신고납부’ 제도를 주로 채택하고 있다. 이 방식은 국민의 올바른 납세정신이 뒷받침되지 않는 한 징수의 실효성이 떨어지는 약점이 있지만 대부분의 세금이 경제생활의 후행적 성격을 갖고 있어 선제적인 징수 자체가 기술적으로 어렵다는 점에서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강제적 세금 징수가 촉발시켰던 ‘저항’의 역사도 신고납부 제도 정착의 원인이었으리라.

그러나 도입 배경이 무엇이든 세금 징수를 책임지고 있는 세정 당국이라면 납세의 자발성 확보에 진력해야 한다. 절세의 가면을 뒤집어 쓴 탈세범들을 끝까지 추적해 체납 세금을 거두어들이는 일이야말로 일반 국민들의 자발성을 획득하는 지름길임은 두 말할 필요도 없다.

그래서일까? 국세청은 예의 서슬 퍼런 ‘체납 세금 추징방안’을 또다시 꺼내 들었다. 이번에는 부가가치세가 타깃이다. 전체 체납 세금의 30%를 차지하고 그 규모 또한 7조원이 넘는다니 국민적 공분을 사기에도 충분해 보인다.

그런데 어떻게 된 게 이번에는 ‘끝까지 추적’이나 ‘일제 점검’ 대신 이름도 생소한 ‘대리납부’ 라는 제도를 도입하겠다고 큰소리다. 부가세 탈루가 심하다며 이를 원천 차단하기 위한 방편으로 신용카드 회사에게 ‘대리납부’시키는 방안을 강구하겠다고 한다. 결국 세금 징수의 권한을 민간에 위임하겠다는 얘기인데, 정부(세정 당국)가 이래도 되는 것인지 그럼 정부는 무슨 일을 하겠다는 것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아니나 다를까, 세법 개정안이 나오기도 전인데 벌써부터 논란이 거세다.

부가세는 다른 세금과 달리 ‘대리납부’ 라는 제도가 있다. ‘비거주자나 외국법인으로부터 용역을 공급받고 그 대가를 지급하는 경우’나 ‘통관절차를 거치지 않아 거래사실의 포착이 어려울 때’와 같은 ‘특수한 상황’에 한해 용역을 공급받은 자가 용역의 공급자를 대신해 부가세를 징수하도록 하는 제도다. 따라서 신용카드 회사에 대리납부를 강제하려면 신용카드 거래가 특수한 상황에 해당하는지 여부를 먼저 따져야 한다.
그런데 신용카드를 통한 거래는 ‘거래사실 포착이 너무나 손쉽고 거주자 간 거래로서 과세 형평을 따질 이유도 없는’, 한마디로 ‘일반적인’ 거래이기 때문에 대리납부를 강제할 이유가 없다. 그리고 신용카드를 통한 매출은 원천적으로 누락이 불가능하기 때문에(전자적으로 처리됨에 따라 세원이 노출됨) 매출 누락 방지라는 제도 도입의 목적과도 배치된다. 더구나 대리납부의 주체가 최종 소비자인 경우(국밥 한 그릇 먹고 부가세만큼은 본인이 따로 납부해야 한다고 가정해 보라!) 신고납부 자체가 성립하기 어렵다.

이처럼 특수한 상황도 아니고 매출 누락 가능성도 없으며 납세 의무자 문제까지 생기는 판국에 대리납부 제도를 도입하려다 보니 자연 논리가 궁색해질 수밖에. 세정 당국은 매출 누락 대신 가공업체를 통한 부가세 탈루나 폐업 이후 부가세 체납 등을 지적하고 소비자 대신 신용카드 회사를 대리납부 주체로 지목하면서 분위기 반전을 꾀하기 시작했다. 주로 고의 폐업을 통해 부가세가 탈루되고 있으니 신용카드 회사에 부가세를 대리 납부시키면 이를 원천적으로 차단할 수 있다는 얘기렷다.

상인들은 부가세 대리납부 제도가 현금유동성을 크게 악화시킨다며 반발한다. 부가세를 신고 납부할 때까지 법인은 최대 3개월, 개인사업자는 최대 6개월 동안 매출세액을 영업자금으로 활용할 수 있는데 부가세 대리납부를 하게 되면 신용카드 회사로부터 부가세를 뺀 금액만 받게 돼 부가세만큼 영업자금이 줄어들게 된다는 주장이다.

신용카드 회사들은 대리납부 제도 도입을 위해 필요한 천문학적인 시스템 구축비용과 인건비를 정부가 카드업계에 떠넘길 것을 우려하고 있다. 카드 거래가 취소될 경우 예상되는 부가세 환급을 둘러싼 다양한 형태의 민원과 가맹점(상인)의 신용카드 수수료(부가세 해당 분) 납부 거부 가능성도 카드업계가 걱정하는 대목이다.

정부는 당초 대상 업종에 올랐던 주유소를 제외하고 유흥주점과 대형마트 그리고 백화점에 한정해 대리납부 제도를 시행하겠다는 입장이다. 유흥주점은 고의 폐업을 통한 탈세가 가장 심한 업종이고 대형마트와 백화점은 대기업이 참여하고 있으니 여론도 우호적일 것이라는 믿음에 기초한 듯 보인다. 대상 업종의 분리를 통해 소상공인의 조세저항을 차단하려는 속셈도 엿보인다. 그러나 업종 추가는 제도 신설에 비하면 식은 죽 먹기일 터 국세청이 한 번 맛 본 ‘편한 추징’의 유혹을 유흥주점에서 멈출 지는 글쎄, 과연 그럴까 싶다.

사업자가 받을 수 있었던 부가세의 이자부분만큼 보조금을 도입하거나 신용카드 수수료를 인하하는 방안도 고려 중이라고 하는데 원가 이하의 수수료로 인해 생존 기반마저 무너지고 있다고 아우성치는 신용카드 회사들을 어떻게 설득하겠다는 것인지 당최 알 수가 없다. 더구나 다수의 선량한 사업자를 잠재적 범법자(탈세범)로 모는 건데 법적 정당성이나 과연 확보할 수 있을지, 난 모르겠다.

경기불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정부지출이 늘어나야 하는데 굳이 조세부담률을 높이지 않아도 세수를 늘릴 수 있다고 하니 귀가 솔깃했을 것이다. 그러나 어려울수록 정공법을 택해야 한다. 확장적(혹은 안정적) 재정을 위한 재원은 부자감세 철회와 적정한 세율 인상을 통해 얻어져야 계속성을 담보할 수 있다. 결코 ‘쉬운’ 행정으로 풀 일이 아니다. 존재 기반이라고까지 얘기하던 소상공인의 이해를 무시하고 정부의 행정 편의적 발상에 부화뇌동한 야당은 그래서 더 문제다. 재검토를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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