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금융신문=장기영 기자> “설렁탕을 사왔는데 왜 먹지를 못하니.”

현진건의 소설 ‘운수 좋은 날’의 주인공인 인력거꾼 김첨지가 앓아누운 아내에게 줄 설렁탕을 사들고 귀가했다 싸늘하게 식어버린 아내의 시체 앞에 울부짖으며 한 말이다.

아내가 죽은 날, 그날은 김첨지에게 이상하게 운이 좋은 날이었다. 며칠 동안 구경하지 못했던 손님을 연거푸 날랐고, 덕분에 아내가 평소 먹고 싶다던 설렁탕을 샀다.

하지만 설렁탕을 앞에 둔 아내는 아무런 말이 없었고, 설렁탕은 아내의 몸과 함께 식어버렸다.

자살보험금 논란에 시달려온 생명보험사들에게, 정확히 말해 청구 소멸시효가 지난 자살보험금 지급을 미뤄온 7개 회사에게 오늘(30일)은 소설 속 아내의 그날과 같은 날이었다.

대법원 3부는 교보생명이 계약자의 자살 후 청구 소멸시효 2년이 경과한 재해사망특약 보험금, 이른바 자살보험금을 지급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확인해달라며 제기한 채무부존재 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한 원심을 이날 확정했다.

이번 판결은 교보생명은 물론 삼성생명, 한화생명, 알리안츠생명, KDB생명, 동부생명, 현대라이프생명 등 청구 소멸시효 경과 보험금 미지급 보험사들에게 기다리던 설렁탕과 같았다.

대법원 판결과 무관하게 자살보험금을 모두 지급하라는 금융감독원의 권고에도 입장을 바꾸지 않아 보복성 검사까지 받았던 이들 보험사는 누구보다 설렁탕을 기다렸다.

그러나 대법원이란 이름의 김첨지가 소멸시효 경과 자살보험금은 지급하지 않아도 된다는 내용물이 든 설렁탕을 사온 날, 보험사들의 처지는 결국 설렁탕 국물 한 술 떠먹지 못 한 아내와 같았다.

금감원이 최고 사법기관인 대법원의 판결에 아랑곳 않고 고강도 제재 카드를 꺼내들며 숟가락을 빼앗았기 때문이다.

해당 보험사들은 금감원의 압박을 의식한 듯 내주 교보생명에 판결문이 도착하면 판결 취지를 검토해 보험금 지급 여부를 결정하겠다며 입장 정리를 미뤘다.

금감원 고위 간부가 직접 나서 그래도 자살보험금은 지급해야 한다고 밝히는 상황에서 감춰진 미소를 드러냈다간 설렁탕은커녕 뚝배기에 뒤통수를 맞을 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작용했다.

물론 대법원에게는 아내를 생각하는 김첨지의 간절함 같은 건 없었다. 식어버린 설렁탕처럼 차가운 논리로 법적 타당성을 따졌을 뿐이다.

소설 속 아내가 이미 숨을 거둬 설렁탕을 먹지 못했다면, 보험사들은 살아있는데도 설렁탕을 먹지 못하고 있다는 것도 다른 점이다.

금감원의 눈치를 살피며 설렁탕을 떠먹지 못하는 보험사들에게 대법원은 이렇게 얘기하지 않을까.

“설렁탕을 사왔는데 왜 먹지를 못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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