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보림으로 심어진 소나무숲, 서원 풍광 돋보이게 만들어
위압적인 누마루 형식 강학당 없어도 품격 느껴지는 장소

최초의 사액서원인 경상북도 영주의 소수서원의 강학당에는 두개의 현판이 붙어 있다. 하나는 최초의 이름인 ‘백운동서원’의 현판이고, 퇴계 이황의 요청으로 국가의 지원을 받게 되면서 명종 5년(1550년)에 ‘소수서원’이라는 현판을 받아 강학당 안쪽에 걸었다
최초의 사액서원인 경상북도 영주의 소수서원의 강학당에는 두개의 현판이 붙어 있다. 하나는 최초의 이름인 ‘백운동서원’의 현판이고, 퇴계 이황의 요청으로 국가의 지원을 받게 되면서 명종 5년(1550년)에 ‘소수서원’이라는 현판을 받아 강학당 안쪽에 걸었다

흔히 ‘학자수’를 말할 때 인용되는 나무는 회화나무다.

서울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을 들어서면 왼편으로 우뚝 서 있는 네 그루의 나무가 있는데, 바로 그 나무다.

여름이 다 돼서야 하얀색 꽃을 피우는 이 나무는 노거수일수록 수형이 아름답다. 이파리를 다 떨구는 겨울과 봄의 나뭇가지는 그 자체가 예술작품처럼 기품이 서려 있기도 하다.

그래서 성리학의 세계에서 이 나무는 선비를 상징하는 나무다. 그런데 ‘학자수’라는 별호를 소나무에게 붙인 경우가 한 곳 있다.

태백산맥에서 소백산맥이 갈리는 경상북도 영주의 소수서원에는 150여 그루의 아름드리 소나무가 서원 앞 둔덕과 마당을 가득 채우고 있다. 마치 서원을 보호하는 호위무사와도 같은 형세다.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인 소수서원을 만들 당시(1541년, 중종36년) 풍기 군수 주세붕은 평지에 서원을 만들면서 땅의 부족한 기운을 보충하기 위해 1000여 그루의 소나무를 심는다.

일종의 비보림이다. 여기에 뜻 하나를 더 보탰다.

사철 푸른 소나무의 기상을 서원을 오가는 선비들이 닮아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선택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소수서원의 소나무들을 ‘학자수’라는 별칭을 갖게 된 것.

현재 서원에 있는 나무는 주세붕이 심은 나무의 후손들이다. 대략 200여 년 정도 됐다고 하는데, 햇볕 좋은 평지라서 나무의 생육 상태는 무척 좋다.

서원에서 공부하던 선비들에게 그들이 돼주었고, 사철 푸르른 모습은 그들에게 호연지기를 느끼게 했을 듯싶다.

소수서원이 들어선 곳은 숙수사라는 사찰이 있던 장소다. 그래서 서원 곳곳에는 숙수사 시절의 유적을 발견할 수 있다.

대표적인 것이 절의 규모를 알려주는 당간지주다. 소수서원의 원래 이름은 백운동 서원이다. 서원 맞은편 연화봉에 늘 흰 구름이 머물고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주세붕이 이 지역 출신으로 고려말에 주자학을 들여온 안향을 모시기 위해 서원을 만들었고 때마침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한 안향의 11대손 한현이 서원의 경제적 기반을 만들어 주면서 서원의 규모가 더 커졌다.

또한 퇴계 이황이 풍기 군수로 오면서 명종 임금으로부터 사액을 받게 되는데, 사액은 현판을 받는 동시에 운영 경비 충당을 위한 전답과 노비까지 국가가 책임지는 것을 말한다.

소수서원의 담장 밖에는 아름두리 소나무 150여 그루가 있으며 500년 이상된 것으로 추정되는 은행나무 두 그루가 서원 입구 양쪽에 서 있다. 사진은 솔숲 가장자리에 있는 은행나무 모습이다.
소수서원의 담장 밖에는 아름두리 소나무 150여 그루가 있으며 500년 이상된 것으로 추정되는 은행나무 두 그루가 서원 입구 양쪽에 서 있다. 사진은 솔숲 가장자리에 있는 은행나무 모습이다.

그 결과 서원에는 두 개의 현판이 다 붙어있다.

서원의 정문 옆으로 경렴정이라는 정자를 지나 서원의 정문으로 들어서면 강학당이 나타나는데 앞쪽에 붙은 현판은 ‘백운동’이라고 되어 있고, 강학당 안쪽에 붙은 현판에는 ‘소수서원’이라고 걸려 있다.

이 밖에도 서원에는 주세붕의 흔적을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 서원 밖 하천가 죽계바위에는 붉은 글씨로 ‘경(敬)’이라고 쓰여 있다.

서원 건설 당시 죽계바위에서 울부짖는 소리가 났다고 하는데, 이 소리의 근원을 단종 복위 사건에 연루돼 억울하게 죽은 금성대군 원혼의 소리로 보고, 주세붕은 성리학의 핵심 개념인 ‘경(敬)이라는 글을 통해 원혼을 달랬던 것이다.

소수서원 나무 중 빠지지 않고 나오는 나무 두 그루가 있다. 서원을 포함한 성리학의 공간에서 가장 자주 볼 수 있는 나무다.

500년은 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은행나무 두 그루다. 중국에선 공자가 사랑한 살구나무를 더 아낀다지만 우리나라에선 문화적 차용을 통해 은행나무가 그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한 그루는 술숲 가장자리에 서 있고, 또 한 그루는 서원 정문 앞 경렴정이라는 정자 뒤편에 서 있다.

필자가 서원을 찾은 날 또한 많은 관람객이 나무를 보고 있었다. 어린 유치원생부터 나이 지긋한 어르신까지 다양하다.

햇살을 찾아 하늘로 키높이 경쟁을 벌이듯 자란 은행나무를 보면 소수서원의 긴 역사가 단박에 느껴진다.

특히 소수서원의 소나무 숲의 외곽에서 자라고 있는 은행나무는 ’서로 또 같이‘ 서원을 지키고 서원의 뜻을 받들고 있었다.

이런 특징은 율곡 이이를 모신 자운서원이나 퇴계 이황을 모신 도산서원, 유성룡을 모신 병산서원과 다른, 소수서원만의 품격을 보여주는 듯하다.

위세 등등한 누마루 형태의 강학당이 없어도 소나무와 은행나무가 서원의 품위를 돋보이게 만들고 있는 소수서원을 그래서 생태적인 가치가 더 많이 느껴지는 성리학의 공간이라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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