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분방하고 절도 있는 기상, 성리학 체계에선 ‘학자수’
느티나무만큼 많은 정자나무, 서원·향교에도 다수 식재

창덕궁 정문인 돈화문을 들어서면 왼쪽으로 도열하듯 서 있는 나무들이 있다. 회화나무다. 기품있게 서 있는 이 나무는 성리학 세계의 중심 나무다. 중국의 주나라 이후 선비들의 무덤에 주로 심었다고 한 이후 궁궐과 서원 향교 등엔 은행나무만큼 많이 식재돼 있다. 사진은 8월경 촬영한 것으로 한창 노란색 꽃을 피우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창덕궁 정문인 돈화문을 들어서면 왼쪽으로 도열하듯 서 있는 나무들이 있다. 회화나무다. 기품있게 서 있는 이 나무는 성리학 세계의 중심 나무다. 중국의 주나라 이후 선비들의 무덤에 주로 심었다고 한 이후 궁궐과 서원 향교 등엔 은행나무만큼 많이 식재돼 있다. 사진은 8월경 촬영한 것으로 한창 노란색 꽃을 피우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성리학의 세계를 상징하는 나무 중 그 으뜸은 회화나무일 것이다.

다른 나무들이 이파리를 내거나 꽃봉오리를 내밀면서 봄을 재촉할 때도 회화나무는 미동도 하지 않는다.

여름에 들어설 기미가 나타나야 그때에서나 이파리를 내고, 한여름이 돼서야 연한 노란색 꽃이 고개를 든다.

그전까지 회화나무는 자신의 수형을 감추지 않고 나목 그대로를 보여준다.

 그런데 그 모양새가 참 우아하다. 이파리도 없고 꽃도 피지 않았지만, 그리고 수령이 오래된 나무일수록 고고한 기풍이 느껴진다.

가지의 모양이 자유분방하면서도 절도가 있어 더 그래 보인다. 그래서 사랑받는 나무일지도 모른다.

서울 창덕궁의 정문 돈화문을 들어서면 왼쪽으로 여섯 그루의 노거수 회화나무가 마치 양손을 들고 관람객을 환영하듯 서 있다.

그런데 조선시대였다면, 성리학의 세계관을 반영해 입궐하는 관리들에게 궁에서의 법도와 단정함을 요구하는 거울과도 같은 존재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회화나무가 학자수로 불리는 까닭은 봉건시대인 중국의 주나라에서 선비들의 무덤가에 이 나무를 심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유교의 세계에서 이 나무는 궁궐과 공공기관의 뜰에 많이 심었다. 주나라의 조정도 이 나무가 심겨 있어 괴정(槐庭)이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었다.

조선에서도 창덕궁과 창경궁, 그리고 덕수궁 등의 궁궐과 외교문서를 관장하는 승문원, 그리고 지방의 관아와 서원에도 회화나무는 은행나무만큼 많이 심겨 있다.

그런데 회화나무가 학자수에 머물렀던 것은 아니다. 느티나무 다음으로 많은 정자나무로 키워진 나무이기도 하다.

그래서 회화나무 그늘은 쉼터였고 놀이터이기도 했다. 이태수 시인의 ‘회화나무 그늘’이라는 시를 살펴보자.

충청남도 서산에 있는 해미읍성에는 600년 정도 된 회화나무 한 그루가 우뚝 서 있다. 흔히 학자수라고 일컬어지는 나무지만, 천주교 박해가 심했던 조선 후기, 이 나무는 교수목이 되기도 했다. 올 4월 찍은 사진이지만, 아직 이파리조차 내지 않고 나목을 보여주고 있다.
충청남도 서산에 있는 해미읍성에는 600년 정도 된 회화나무 한 그루가 우뚝 서 있다. 흔히 학자수라고 일컬어지는 나무지만, 천주교 박해가 심했던 조선 후기, 이 나무는 교수목이 되기도 했다. 올 4월 찍은 사진이지만, 아직 이파리조차 내지 않고 나목을 보여주고 있다.

 “한 백 년 정도는 그랬을까. 마을 초입의 회화나무는 언제나 제자리에서 오가는 길들을 끌어안고 있는지도 모른다.

세월 따라 사람들은 이 마을을 떠나기도 하고 돌아오기도 했으며 나처럼 뜬금없이 머뭇거리기도 했으련만, 두껍기 그지없는 회화나무 그늘.”

백 년쯤 된 나무면 충분히 어른 몇 사람은 그 그늘에 숨길 수 있을 정도로 아름드리로 커진다.

오가는 길손들에게 그늘을 만들어주는 나무. 그래서 어쩌면 일상에 더 다가와 있던 나무이지 않을까 싶다.

18세기에 그려진 그림 중에 강희언의 ‘사인시음(士人詩吟)’이라는 그림이 있다.

아름드리나무 아래 선비 여섯 사람이 책을 읽거나 시를 쓰거나 수염을 쓰다듬으며 시상을 떠올리는 그림이다.

배경을 그리지 않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어느 관청이나 서원, 향교 앞은 아닌듯하다. 그저 마을 어귀쯤으로 보이는 곳에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데 이 나무가 바로 회화나무다.

나무 학자 임승빈의 《이야기가 있는 나무백과》를 보면 회화나무와 느티나무는 비슷한 점이 많다고 말한다.

그리고 한자 괴(槐)는 두 나무를 다 뜻한다고 설명한다.

그런데 회화나무는 호탕하고 대담무쌈해 일정한 순서에 얽매이지 않지만, 느티나무는 세밀하고 성실해 정해진 순서에 착실하게 따르는 성품을 보인다고 적었다.

하지만 수백 년을 살아남은 궁궐이나 관청의 회화나무는 호방함을 봐 온 것은 아니다.

창경궁 문정전 앞뜰의 회화나무는 사도세자의 죽음을 목격한 나무다. 영조 38년 여름 뙤약볕에서 뒤주에 8일간 갇혀 있다 죽은 사도세자.

그 죽음을 봐서일까. 선인문 앞에 있는 회화나무도 속이 썩어있다. 나무도 안타까워서 그렇게 됐다고 말한다. 

해미읍성에 있는 600년 된 회화나무도 마찬가지다. 나무 높이가 약 12m인 이 나무 주변에는 큰 감옥이 있었고, 수많은 천주교도가 이 나무에서 교수형으로 죽었다.

그 순간 이 나무는 더 이상 학자수가 아니었으며, 단지 교수목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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