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장지수증권(ETF) 베끼기 관행이 투자자한테는 좋은 거 아니에요?”

거래소가 베끼기 관행을 근절한다는 소식으로 얘기를 나누다 취재원에게 들은 말이다. 상품을 따라내지 못하도록 신상품 상장에 엄격한 규제를 두면 오히려 투자 선택지가 줄어들 수 있고, 보수료 인하 경쟁도 결국 투자자 입장에선 낮은 비용을 내면 되니 좋은 게 아니냐는 논리였다.

틀린 말은 아니라는 생각에 즉각 답을 하지 못했지만, 조금만 대화가 이어지자 바로 '그럴 수 없다'는 결론을 냈다. 당시엔 베끼기 관행이라는 말이 주는 부정적인 어감에 묻혀 사안을 한 쪽으로만 보고 있는 건 아니었나라는 생각도 스쳐들었다.

최근 자산운용사 간 ETF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비슷한 콘셉트의 상품들이 쏟아지고 있다. 현재 거래소엔 약 750개의 ETF가 상장돼 있는데, 이름만 다른 비슷한 유형의 상품들이 태반이다.

최근에는 2차전지소재를 테마로 한 ETF가 대표적이다. 지난 4월 신한자산운용이 2차전지 소부장(소재·부품·장비)을 중심으로 담은 ‘SOL 2차전지소부장Fn’ ETF를 상장했는데, 이어 7월 삼성자산운용과 미래에셋자산운용이 유사한 콘셉트의 ETF를 내놨다.

이 상품들은 2차전지 소재라는 큰 콘셉트는 같지만, 지수를 구성하는 주요 구성 종목은 거의 비슷하다. 특히 신한운용과 미래에셋운용의 관련 ETF는 31일 기준 상위 15개 구성 종목은 투자 비중, 순위에선 차이가 있었지만 모두 동일했다.

유사한 상품끼리는 보수료 인하경쟁도 펼쳐졌다. 지난달 한국투자신탁운용의 'ACE 미국배당다우존스' ETF가 보수를 연 0.06%에서 0.01%로 파격 인하했다. '한국형 SCHD'라 불리는 고배당 ETF들이 줄줄이 상장하자 투자자를 선점하기 위한 보수인하 경쟁이 벌어진 결과다.

ETF 연 보수가 0.01%이라는 건 순자산 1000억원 기준 운용사가 받을 수 있는 보수가 1000만원에 불과하다는 소리다. 제 살 깎아먹기 현상이 업계를 망칠 수 있다는 얘기까지 나왔다.

내부 출혈만 남기는 치킨게임식 경쟁이 펼쳐지면 결국 살아남는 건 상위 몇 개사다. 대형사를 제외하고 기초체력이 약한 ETF 운용사들은 비즈니스를 계속할 수록 체력이 먼저 고갈될 수 밖에 없고, 시장 성장을 저해하는 요소로 작용한다.

과거 ETF 운용규모가 커지기 전 일반 공모펀드 시장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원자재펀드나 중국펀드 등이 인기를 끌면, 유행만 따라 펀드를 출시했다 수익률 방어에 실패하고 이는 공모펀드에 대한 투자자들의 불신도 깊어지는 계기가 됐다.

최근에는 사안이 심각해지자 거래소가 ETF 베끼기 관행을 근절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그러나 가장 어려운 문제는 신상품을 어떤 기준으로 판단해야 할지, 주체, 방식 등을 정하기 모호하다는 점이다. 일례로 국내에선 최초더라도 해외에 이미 상장돼있는 유사한 콘셉트나 구성을 지닌 ETF가 있다면 '배타적 사용권'을 부여해도 될까.

이제는 운용사들의 자정 작용이 필요한 시점이다. 제도적 장치는 시장의 자율조절 기능을 약화시킨다. 자칫 베끼기 관행을 막기 위해 제도적 장치를 뒀다, 괜히 운용사의 업무 처리가 복잡해지고 투자자들의 불신이 깊어지는 상황이 펼쳐질 수 있다. 자율성을 유지하면서 투자자 보호도 강화하는 방향의 검토가 이뤄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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