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후 포도원 늘면서, 전국적으로 재배
북미가 고향, 국내에 들어온 지 115년 돼

상업적 목적으로 우리나라에서 재배된 포도의 누적 생산량을 추계할 수 있다면 단연코 1위는 ‘캠벨얼리’의 몫이다. 샤인머스캣 광풍이 불기 전까지 이 품종은 ‘국민포도’라고 불러도 될 정도로 많은 지역에서 재배됐다. 2000년대 초반까지 전체 재배면적의 70%를 넘어설 정도였으니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우리 국민이라면 누구나 포도의 달고 신 맛의 기억을 이 포도에서 얻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포도나무 세 그루 중 한 그루는 ‘캠벨얼리’일 정도로 많이 재배하고 있는 포도이기도 하다.

▲ 캠벨얼리는 추위와 병충해에 강한 품종으로 우리 땅에서 115년을 살아온 포도다. 사진은 대표적인 캠벨얼리 산지인 충북 영동의 ‘월류원’ 포도원의 수확전 사진이다. (사진 : 월류원)
▲ 캠벨얼리는 추위와 병충해에 강한 품종으로 우리 땅에서 115년을 살아온 포도다. 사진은 대표적인 캠벨얼리 산지인 충북 영동의 ‘월류원’ 포도원의 수확전 사진이다. (사진 : 월류원)

‘캠벨얼리’는 어떤 품종인가


이렇게 ‘국민포도’의 자리까지 올랐던 ‘캠벨얼리’는 어떤 품종일까. 우선 이 품종은 우리나라의 토착종이 아니다. 그렇다고 유럽종도 아니다. ‘캠벨얼리’는 1892년 미국 오하이오주에서 만들어졌다. 북미지역은 겨울이면 칼바람이 부는 곳이다. 이곳에서 육종가 G. W. 캠벨이 ‘모어얼리’라는 품종과 ‘벨비데르’, ‘머스캣 함부르크’ 품종을 교배해서 얻어낸 포도다. 캠벨은 북미 지역 대표 품종인 ‘콩코드’의 단점을 개선하기 위해 15년 동안 이 품종을 연구했다고 한다. 미국의 과수 재배자를 위한 매뉴얼로 만든 《미국포도의 도해설명》(1895년)에 따르면 ‘캠벨얼리’는 “풍미가 풍부하고 폭시 플레이버도 없으며 과육은 약간 살이 많고 씨앗이 있지만, 과육과 잘 분리되며 껍질은 얇고 열매는 잘 떨어지지 않는다”고 적고 있다.

출신 지역에서 알 수 있듯이 ‘캠벨얼리’는 ‘참을 인(忍)’자 세 개쯤은 DNA에 새기고 태어났다. 혹독한 추위도 견뎌내고 한여름의 장마와 태풍도 이겨낸다. 현재까지 육종된 포도 중에서 우리 기후와 풍토에 가장 잘 맞는 품종임을 지금까지 살아온 이 포도의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1908년에 우리 땅에 들어왔으니, 115년 동안 굳건히 살아남은 모습에서 우리는 ‘캠벨얼리’ 품종의 생명력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 품종이 어디에서 얼마나, 그리고 어떻게 자랐는지 잘 모른다. 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없기 때문이다. 아마도 파편처럼 사방에 흩어져 있는데 이를 꿰어낼 눈이 없어서 찾지 못했을 수도 있다.

우리 땅에서 자란 ‘캠벨얼리’의 역사는 언론을 통해 그나마 조금이라도 확인할 수 있다. 그 첫 기록은 일제강점기 때인 1935년 《조선일보》다. 여름이 무르익은 8월 20일 자, 제목은 ‘느진 여름부터 첫가을에는 포도가 제일’이라는 기사다. 이 기사에서 ‘캠벨얼리’는 ‘캠벨스아-리-’라는 장음표기가 돼 등장한다. 참고로 ‘스’는 소유격을 뜻하는 ‘′s’다. 앞서 인용한 미국의 포도재배자를 위한 매뉴얼에도 ‘′s’라고 돼 있고 우리 기록에도 1960년 때까지 언론들은 ‘캠벨스어리’라고 표기하고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기사에서 ‘캠벨얼리’는 양조용으로 소개되고 있다는 점이다. ‘블랙함부르크’, ‘머스캣 오브 알렉산드리아’ 등과 함께 여러 품종이 등장하는데 “양조용으로 포도주나 포도즙 만드는데 대개 이 포도를” 쓴다고 기록하고 있다. 육종목적은 생식용이었지만, 일제강점기 동안 양조용으로 살아온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1958년 같은 신문에 인용된 ‘포도주 양조법’ 관련 기사에서도 ‘캠벨얼리’는 ‘컴벨스어리’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데, “주질은 불량하나 주량은 별차가 없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를 보면 이 품종의 포도주 양조 시도는 생각보다 많았던 듯하다.

사진 : 국립원예특작과학원
사진 : 국립원예특작과학원

캠벨얼리, ‘국민포도’가 되기까지


포도는 해방 이후에도 무척 비싼 과일이었다. 일제강점기 때는 더 그랬다. 서울에 포도원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재배면적이 넓지 않았다. 서울에는 성북동과 청량리, 뚝섬 등에 포도원이 있었지만, 서울의 확장과 함께 사라져갔다. 그나마 서울 인근의 안양과 소사에 있던 포도원이 있었기에 서울시민들은 포도를 구경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8.15해방, 특히 6.25전쟁의 시공간은 농민들에게 가혹하기만 했다. 안정을 찾은 뒤에도 농업정책은 주곡, 즉 ‘쌀’이 중심이었다. 그나마 1950년대 중반이 되면서 일부 농부들이 포도원을 만들기 시작한다.

1954년 경기도 안산의 대부도와 경북 김천, 그리고 이듬해 충북 영동, 1960년에는 경북 영천에 포도원이 들어선다. 모두 외부에서 묘목을 가지고 와서 조성했다고 한다. 그나마 경북 김천은 묘목을 가져온 지역이 명시돼 있다. 경기도 안양이다. 즉 안양에서 재배되던 캠벨얼리가 남하를 시작한 것이다. 대부도도 그렇고 영동도 그랬을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 포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안양의 포도는 언제 시작했을까. 안양지역도시기록연구소의 자료에 따르면 1930년대 중반 안양유원지(현 안양예술공원)가 조성되면서 일본인들에 의해 포도원이 조성됐다고 한다. 당시 안양역장이 철도 여객을 늘리기 위해 관악산 계곡에 수영장을 만들었고, 이에 발맞춰 같은 시기에 일본에서 묘목을 가져와 포도원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자세한 품종명은 등장하지 않는다.

이렇게 시작된 ‘캠벨얼리’ 포도원은 전국적으로 퍼져나간다. 국립원예특작과학원의 포도재배변동정보에 따르면 1982년은 수도권의 안양과 김포, 가평 그리고 충북 영동과 경북 상주와 영천 등에서 주로 재배했다. 그러다 1997년이 되면 경북 김천과 군위 등 산이 많은 지역에 포도원이 급증한다. 이와 함께 경기도 안산과 안성, 그리고 충남 천안지역의 포도 재배가 빠르게 늘어났다. 거봉 품종을 심은 포도원이 늘어난 덕분이다.

캠벨얼리는 2000년대까지 주력 품종이었고, 5년전까지 전체 재패면적의 50%를 차지했으나 샤인머스캣의 등장으로 빠르게 줄고 있다.
캠벨얼리는 2000년대까지 주력 품종이었고, 5년전까지 전체 재패면적의 50%를 차지했으나 샤인머스캣의 등장으로 빠르게 줄고 있다.

그러다 2015년 이후 ‘캠벨얼리’가 감소세에 들어간다. 포도 재배면적 자체가 줄어든 탓도 있지만, 샤인머스캣 품종이 빠르게 증가했기 때문이다.

‘캠벨얼리’가 해방 전부터 주력 품종이었는지는 알 수는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해방 이후 포도원의 확산과정은 ‘캠벨얼리’의 시대의 개막을 의미한다. 이 과정을 거치면서 우리는 포도를 말하면 자연스레 ‘캠벨얼리’를 연상하게 됐다.

김승호 편집위원 skylink999@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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