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全) 금융권 협회와 중앙회, 한국신용정보원 및 12개 신용정보회사가 서민·소상공인 약 290만명의 최근 2년간 연체 이력을 공유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코로나19 여파에 더해 고금리, 고물가가 장기 지속하면서 신용회복에 어려움을 겪는 이들의 원활한 자금조달을 돕겠다는 취지다. 지난 11일 민·당·정 협의회에서 논의된 걸 수용했다.

(관련기사 : 2024년 1월 5일자 보도, 금융권, 서민·소상공인 290만명 신용사면)

당국은 이번 지원 방안으로 약 290만명이 신용을 회복해 대환대출, 카드발급 등의 금융거래 접근성이 향상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시장의 반응은 떨떠름하다. 성실 상환자에 대한 역차별 문제가 불거질 수 있다는 지적이다. 어려운 여건에도 후일을 생각해 연체 이력을 남기지 않고자 고군분투한 사람만 바보였다는 자조 섞인 목소리까지 흘러나온다.

이에 당국은 소액연체자(2000만원 이하) 중에서 오는 5월까지 채무를 전액 상환한 경우만을 대상으로 하는 만큼, 늦게나마 재기 의지가 있는 자에게 정상적인 경제활동으로 신속히 돌아올 수 있도록 필요에 의해 기회를 제공하는 것일 뿐이라고 설명한다.

그런데 과연 경제적 충격 발생으로 ‘불가피한 연체’를 낸 이들에게 내준 기회는 문제 될 것이 없는 게 맞을까.

지난 2003년 대규모 신용불량자를 양산한 ‘카드 사태’는 신용카드를 무분별하게 발급해주고, 연체 위기에 빠진 취약차주에게 대환대출을 권장한 데서 비롯됐다.

연체자의 원활한 신용카드 발급과 대환대출 이용을 위해 신용을 사면해준 이번 조치와 다를 바 없는 배경이다.

물론 당시보다 신용카드 발급 규제가 강화되고 고금리의 제2금융권 대환대출 총량도 많이 줄었지만, 경제성장이나 전반적인 금융환경과 같은 거시적 여건에서 안심하긴 어려운 상황이다.

금융사이클 심도(진폭)을 나타내는 실질신용갭률은 코로나19 이후 단기간 내 빠르게 확장하고 있다.

한국은행 금융안정국이 우리나라 평균 금융사이클 주기(약 24.5분기)에 따라 측정한 지난 2022년 3분기말 기준 실질신용갭률은 5.1%로, 2003년 신용카드 사태(3.4%)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4.9%)를 웃돈다.

실질신용갭률은 실질 민간신용 총액이 과거 장기 추세에 비해 얼마나 확대 됐는지 판단할 수 있는 지표로, 신용 확장기에 실물경제 개선이 동반되지 않는다면 금융시장이 취약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코로나19 이후 정부에서 추진한 각종 빚 탕감 정책에 아직 연체율 등 건전성 지표는 적정 수준을 보이긴 해도, 금융사들은 ‘깜깜이 부실’ 우려로 불안에 떨고 있는 실정이다.

이 같은 상황에 총선을 앞두고 남발하는 포퓰리즘 정책이 금융시장의 근본인 ‘신용’에 대한 관심과 감각을 무디게 만들고 있다.

우리 사회의 건전한 회복을 위해 제공한 기회가 오히려 시장 혼란을 일으키고, 다시 한번 거센 위기를 몰아치게 만든다면 그것 또한 성실 상환자에 대한 역차별이 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대한금융신문 안소윤 기자 asy2626@kbanker.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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