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5-09 20:35 (일)
서울의 대표 술 ‘삼해주’ 2편 조선 문인들의 단골 소재 ‘삼해주’
서울의 대표 술 ‘삼해주’ 2편 조선 문인들의 단골 소재 ‘삼해주’
  • 김승호 편집위원
  • 승인 2017.03.19 17: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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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거정 “극락하고도 바꾸고 싶지 않는 술맛”

영조 금주령 불구, 문인들은 마시고 글로 남겨

   
▲ 무형문화재 김택상 명인이 운영하고 있는 삼청동 소재 삼해소주가의 술항아리와 소줏고리. 공방답게 아담한 모습이다.

<대한금융신문=김승호 편집위원> 삼해주를 마신 조선의 선비들은 한결같이 자신의 시문에 ‘삼해주’에 대한 강한 인상을 남기고 있다. 조선 초기 성종 대의 문신 서거정은 자신의 엮은 책 <태평한화골계전>에서 “극락과도 바꿀 수 없다”는 극찬을 내놓고 있고 선물 받은 삼해주를 마신 고려 말의 문장가 이규보는 ‘시 한 수를 지어 삼해주를 가져다 준 데 대해 사례한다’는 시를 통해 삼해주의 뛰어난 맛을 전하고 있다.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 기대승도 광주 무등산을 돌아보고 식영정에 이르렀을 때 삼해주의 맛에 빠져 ‘식영정의 시에 차운하다’라는 시를 통해 삼해주 사랑을 노래한 바 있다.

그렇다면 서거정은 그의 해학집에서 왜 극락과도 바꿀 수 없다고 이야기했을까. 이야기는 이렇다. 술을 좋아해서 병이 생긴 이씨 성의 장군이 있었는데, 이웃 사람이 그에게 와 술과 고기를 끓고 염불을 하라고 조언한다. 그렇게 하면 극락왕생을 할 수 있다는 말까지 한다. 그런데 이야기를 듣던 장군은 “거기에도 잘 익은 돼지머리와 맑은 삼해주가 있는가?”라고 되묻는다. 산 사람이니 당연히 가본 적 없는 곳이니 그 사람은 “알 수 없다”고 말하자, 이내 “만약 (삼해주)가 없다면, 비록 극락이라도 가고 싶지 않네”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삼해주에 대한 기록은 조선 중기를 넘어 후기로 갈수록 더 많이 나오는데, 이것은 한양으로의 물류 확대 및 상업의 발전에 따라 술의 수요와 공급이 늘어난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임진왜란을 거친 이후에 나오는 삼해주에 대한 기록은 단지 웃어넘길 수 없는 아픔을 담고 있다. 조선 중기의 문인이자 정치인이었던 박인로는 그의 가사 〈누항사〉를 통해 당시의 고단한 삶을 소개하면서 간접적으로 삼해주의 맛을 돋우고 있다.

   
▲ 술독에서 익어가고 있는 삼해주. 잘 익은 술은 과일향이 짙게 난다.

〈누항사〉는 임진왜란이 끝나고 광해군 즉위 3년에 쓰인 글이다. 전란의 여파는 농사짓는 가난한 평민과 선비에겐 가혹했던 것 같다. 박인로 스스로도 누추한 곳에 초막을 짓고 농사를 지었던 모양이다. 당시의 경험을 가사로 정리한 〈누항사〉는 총 7단락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삼해주는 4번째 단락에 등장한다.

내용은 이렇다. 박인로가 농번기가 되어 밭 갈 소를 빌려주겠다고 허언을 한 이웃을 믿고 그 집을 찾았으나 전날 꿩 안주에 잘 익은 삼해주를 대접한 건넛집에 소를 빌려주기로 했다는 소주인의 답답한 대답만 듣고 맥없이 물러나왔다는 내용이다.

임진왜란은 끝났지만 아직 전란이 남긴 상처가 아물지 않아 삶의 피폐함이 가사 내용 곳곳에 들어난다. 이런 삼해주 문학은 숙종 이후에 다시 일상의 문학으로 되살아난다.

영조 때의 문인 김이곤은 마포에 살면서 마포술 삼해주에 대한 시를 남긴다.

“마포 술을 조금 마셔 취하고/높은 누각 대자리에 풀썩 누웠네/쉬지 않고 강물은 하염없이 흘러갔는데/지려하는 달은 여전히 밝기만 하네(…)”

김이곤이 누운 누각이 강변북로 변에 있는 월산대군이 지었다는 망원정인지 확실치는 않다. 하지만 한강을 삶의 터전으로 살아가는 당시의 사람들의 생동하는 모습 때문에 “외로운 성을 등지고”마포에 집터를 잡은 마음을 터놓고 있다.

영조 때 승지와 예조참판을 지낸 남유용의 문장 중에도 삼해주는 등장한다. ‘유서호기(遊西湖記)’라는 글에서 남유용은 당대의 문인들과 삼월 삼짇날 뱃놀이를 나간다. 그런데 이들의 손에 들려 있는 술들이 모두 마포에서 구한 술이다. 정월 해(돼지)날부터 빚었으며 36일에 걸쳐 빚는 작은 삼해주라면 맛있게 익어 마실 수 있는 상황이다. 두 통의 술을 들고 온 황중원의 술이 제일 좋다는 글로 봐서 술을 빚는 집마다 술맛이 제각각이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영조는 조선의 임금 중에서 가장 자주 금주령을 내렸던 왕이다. 그런데도 삼해주에 대한 문학이 많이 등장하는 것을 보면 삼해주가 한양 문화의 한복판에 있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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