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 쌀을 이용한 증류 소주 제조가 가능해진 10여년 전부터 증류소주의 종류가 급증하고 있다. 사진은 지난해 연말 열렸던 우리술품평회에서 전시됐던 증류주들이다.

<대한금융신문=김승호 편집위원> 허리가 뭉뚝한 모래시계 모양을 한 짙은 갈색의 투박한 질항아리. 예전엔 농가에서도 간혹 볼 수 있었지만, 지금은 술박물관에 가야 겨우 볼 수 있는 물건이 된 이 소줏고리에서 우리 소주의 역사는 시작한다.
 
부뚜막 위에 놓인 소줏고리의 머리에는 차가운 냉각수가 찰랑거리고, 땔나무의 화력에 술덧(다 익은 술)이 끓기 시작하면 기화된 알코올은 냉각수의 찬 기운 만나 주둥이를 따라 이슬처럼 방울져 떨어진다. 처음에는 약하게 그리고 이내 졸졸 거리며 뽀얀 김을 내며 술단지에 이슬들이 모아진다. 이렇게 증류한 우리 소주의 알코올 도수는 50~60도 정도. 이를 재차 증류하면 70도를 넘어서는 소주가 된다. 한마디로 증류를 통해 우리 술 청주의 고갱이가 모아지는 것이다. 

내려지는 모양이 이슬 같다해 ‘이슬 로(露)’자를 술 이름으로 쓰기도 하는데 그 흔적이 <춘향전>에 나온다. 한양에 과거보러 가는 이몽룡의 발길을 한 번 더 잡기 위해 춘향이가 마지막에 내놓는 술, ‘감홍로’다. 이밖에도 증류과정에서 다양한 약재를 넣어 고아내듯이 술을 만든다하여 기름 고(膏)자를 쓰는 소주의 이름도 여럿 존재한다. 조선 3대 명주라고 일컬어지는 정읍의 죽력고와 전주의 이강고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그런데 소주는 맑게 거른 귀한 청주 3~4병을 증류해야 고작 한 병을 얻을 수 있었으므로 아무나 마실 수 있는 술은 아니었다. 귀한 만큼 왕가와 양반가에서만 마실 수 있었다. 조선의 국왕들은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는 수단으로 내의원 소속의 양온서에서 빚은 소주와 홍소주(요즘의 홍주) 등을 공신과 자신의 인척들에게 한 해에 몇 차례 하사하기도 했다. 마포나루 인근 독막골 언저리에서 내리던 소주들도 주요 경강상인들과 한양 도성의 양반가에서 주로 소비됐다.

요즘은 국민주라 불릴 만큼 소주를 지천으로 볼 수 있는 시대다. 1965년 양곡관리법이 강화돼 쌀을 이용한 소주 증류가 전면 금지되면서 증류소주가 사라진다. 그 자리를 일제 때 도입된 연속식 증류기를 이용한 희석식 소주가 대신한다. 

일제는 2차 대전을 치르면서 부족한 군수용 알코올을 얻기 위해 연속식 증류 기술을 도입했는데, 값싸게 소주를 만들 수 있다는 장점으로 인해 이 기술은 곧 대세가 된다.

물론 시간을 들여 소주를 내렸던 증류 소주는 원주가 가진 향기를 고스란히 응집시킬 수 있지만 연속식 증류를 통해 얻은 95%의 주정으로 만드는 술에선 향기를 담아내지 못한다. 따라서 소주 회사에선 각종 감미료와 감향을 거쳐 마실만한 술을 만들어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증류소주와 희석 소주의 높은 가격 차이는 희석식 소주의 단점을 가리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희석식 소주가 우리 술 문화의 중심이 되도록 만들었으며,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증류주 타이틀까지 거머쥐게 된다.

이처럼 우리 소주의 원류인 증류소주와 대세가 된 국민주 희석소주는 각각의 장점을 무기로 소비자에게 다가서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꼭 집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다. 우리 술 청주처럼 현재 사용하고 있는 소주의 한자음이 예전 우리 조상들이 사용하는 한자와 다르다는 점이다. 

▲ 우리 술 소주는 다 익은 술덧을 소줏고리에 담아 장작불로 끓이면서 이슬처럼 방울져 떨어지는 술을 받아 내는 방식으로 만든다. 사진은 소줏고리에서 술이 떨어지는 모습.

<조선왕조실록>에 모두 176번에 걸쳐 소주(燒酒)라는 단어가 등장하고 있다. 또한 각종 고조리서와 문집 등에서 이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대세인 희석식 소주는 소주(燒酎)라는 한자어를 쓰고 있다. ‘진한 술 주(酎)’자인 이 한자어는 일본의 소주 표기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것이다. 당연하게도 일제때 만들어진 주세법의 표기를 따르기 때문이다.

심지어 희석식이 아닌 증류 소주를 내고 있는 7곳의 안동소주 공장 중 가장 생산량이 많은 곳에서도 ‘진한 술 주(酎)’자로 소주를 표기하고 있다.

한자어 하나가 술맛을 좌우하거나 술의 의미를 바꿔놓지는 않겠지만, 그 술의 출발지점이 어디인지 그 정체성을 규정하는데 이름만큼 훌륭한 도구는 없다.

그리고 최근 복원되고 있는 증류소주를 통해 ‘진한 술 주(酎)’와 ‘술 주(酒)’의 맛이 어떻게 차이나는 지 우리는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맛의 차이만큼 이름은 그 술의 정체성을 대변한다. 우리 술의 문화적 정체성은 물론 자존감을 소주(燒酒)에서도 회복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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