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 불법의료기관도 민영보험금 지급하라 판결
보험업계 “없던 곳도 생길 판”…보험사기적발 후퇴

<대한금융신문=박영준 기자> 대법원이 사무장병원이라 해도 민영보험사가 보험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판결을 냈다.

쟁점은 국민건강보험의 요양급여비용(건강보험 급여)에 적용된 사기죄가 실손의료보험 및 자동차보험수가에도 적용되는 지 여부였지만 법원은 사무장병원의 손을 들어줬다.

민영보험사는 사무장병원임을 알고 있더라도 위법행위를 눈뜨고 볼 수밖에 없게 됐다. 사무장병원에 현혹돼 과다입원 혹은 허위진료 받은 환자만 사기 혐의로 고발이 가능해진 셈이다.

대법, 민영보험사 대상 보험사기 ‘불인정’

대법원은 지난달 15일 의료법위반 및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사기·사기방조) 등을 위반해 일부 유죄를 선고받은 민모씨와 이모씨 2명에 대한 검사 상소를 기각했다.

이들이 사무장병원을 운영하며 건보공단과 32개 보험사에 청구한 보험금은 총 64억원에 달한다. 건보공단 요양급여비 약 33억원과 민영보험사 보험금 약 31억원 수준인데 2심서는 건보공단 요양급여비만 사기로 인정된 바 있다.

대법원은 비의료인이 개설한 불법의료기관(사무장병원)이라 해도 실손보험금을 지급해야 하는 의무에 영향을 미치는 사항은 아니라고 봤다. 보험수익자는 민영보험사에 실손의료비 청구권을 행사했고 병원은 보험금 청구를 도왔을 뿐이라는 판단이다.

자동차보험수가도 교통사고를 당한 뒤 이에 따른 진료가 이뤄졌다면 민영보험사는 보험금을 지급해야 한다고 결정했다. 설령 불법으로 개설된 병원이라도 면허를 갖춘 의료인(월급제 의사)이 진료했다면 보험금 지급을 거부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이와 반대로 건보공단의 요양급여비용(급여) 약 33억원에 대해 사기죄를 인정한 2심 판결은 인정했다. 건보공단은 의료법에 의해 개설된 의료기관만을 요양기관으로 건강보험제도 내에 편입시키기 때문에 불법 개설된 의료기관에는 보험금을 줄 수 없다고 결정했다.

보험업계 “실손보험은 건강보험과 같은 공공재”

대법원이 건강보험과 민영보험에 다른 잣대를 댄 이유는 실손보험은 가입여부가 개인선택에 맡겨진 사보험이기 때문이다. 사무장병원의 요양급여비용(공보험) 청구에 관한 법리를 실손보험에 그대로 적용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반면 보험업계는 사무장병원의 진료가 보험사의 보험금 지급 대상에서 제외된다고 주장했다. 실손보험 표준약관에서는 ‘피보험자가 병원에서 치료나 처방조제를 받은 경우’ 보험금을 지급하도록 한다.

표준약관에서 병원은 국민건강보험법 제42조에서 정하는 의료법에 따라 개설된 의료기관을 의미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즉 불법 개설된 사무장병원은 애초에 표준약관 상 병원의 정의에서 어긋난다는 뜻이다. 이는 자동차보험수가에 관한 자동차손해배상보장법에서도 마찬가지다.

3000만명이 넘는 가입자를 보유한 실손보험과 의무보험인 자동차보험이 사실상 공보험 형태로 운영돼 건강보험과 다를 바 없다는 것도 보험업계의 주장 중 하나였다.

실손보험은 건강보험에서 보장하지 않는 급여 본인부담금과 비급여를 보완하기 위해 만든 상품이다. 자동차보험과 함께 만성 적자상품임에도 판매 중단이 없었고 정부가 보험료에 직접 개입한다는 점 등이 공공재인 건강보험과 다르지 않다고 본 이유다.

사무장병원 척결 ‘물거품’…수사기법도 회귀

대법원 판결에 따라 사무장병원에 대해서는 사기죄 적용이 불가능해진 상황이다.

사무장병원이 보험사에게 편취한 보험금 전체가 사기로 인정됐다면 사무장병원 적발에 탄력이 붙을 수 있었다는 것이 보험업계의 중론이다. 최근까지도 보험사와 검·경찰 조직은 사무장병원 척결을 위해 특별조사팀 등을 구성, 보험사기범죄 척결에 나섰지만 모두 무산될 판이다.

대표적으로 지난해 광주경찰청은 총 18개팀으로 이뤄진 보험범죄 전담 수사팀을 구성, 총 370건·1319명을 검거했으며 이 가운데 30명을 구속했다. 1년간 광주지역서 적발한 보험사기 금액만 376억원에 달한다.

한 보험사 보험사기조사(SIU)팀 관계자는 “광주서 폐업 처리된 병원 모두 대법원 판례를 보고 재개설하겠다는 이야기가 나돈다”며 “건보공단 요양급여만 반납하면 민영보험사에서 얼마를 뺏어가든 상관없다는 식이다. 이번 판례로 보험사기를 뻔히 보고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됐다”고 말했다.

보험사기 조사기법도 과거로 회귀할 수밖에 없게 됐다. 그간 SIU 조직이나 경찰 등은 제보에 근간해 허위입원이나 과다 의료를 받은 보험계약자에게 직접 사기죄를 적용시키는 방식으로 보험사기 근절에 나서왔다.

다른 관계자는 “보험사기를 조장하거나 권유하는 주체는 사무장병원인데 병원에 현혹되는 보험계약자를 잡아야 하는 꼴”이라며 “오랜 기간 사무장병원 적발에 나서온 입장에서 허탈한 심정”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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