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차맛 새로 알게 된 박수근 명인 체험행사
1996년 수제녹차로 농림부 식품명인 처음 지정
“곡우 때나 10월 입동 때나 차 향기는 모두 같아”
떫고 쓴맛이 없었다. 기대하지 않았던 단맛도 느껴졌다. 순간 미각을 의심했다. 그동안 마셨던 차에선 이런 맛을 못느꼈기 때문이다. 녹차의 색도 노란색보다는 연녹색에 가까웠다. 아니나 다를까 “좋은 녹차는 노란색을 띄지 않습니다”라고 박수근 녹차 명인이 말했다. 색 뿐이 아니다. 좋은 차는 뜨거운 물에 우려도 찻잎이 넓적하게 펴지지 않고, 8~9번을 우려도 차맛에 흔들림이 없다고 설명한다.
경남 하동에서 ’명인다원‘을 운영하고 있는 박수근 식품명인이 지난 10월 5일 대한민국식품명인협회 식품명인체험홍보관(관장 조윤주)에서 ’수제녹차 체험‘ 행사를 가졌다. 흔하게 마시는 녹차라고 생각하면서 시음 체험을 했지만, 명인의 녹차는 시중에서 쉽게 만났던 녹차와 달랐다.
흔히 녹차를 말할 때 곡우 이전에 찻잎을 따야 맛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세작‘이나 ’우전‘ 등의 녹차를 좋은 차로 여긴다. 이 같은 상식을 가지고 질문 몇 가지를 박 명인에게 했다. 하지만 돌아온 답은 달랐다. “차는 곡우를 전후해서 딴 잎이나 음력 10월 입동에 따서 만든 차나 똑같은 향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만드는 방법을 달리해서 만들 뿐입니다.” 또 한 번 필자의 상식이 무너졌다. 녹차를 알고 마신다고 생각했지만, 명인과의 대화를 통해 확인된 것은 차를 알지 못했다는 사실과 차맛도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좋은 찻잎은 보통 ‘구증구포(九蒸九曝)’를 해서 만든다고 알려져 있다. 그래서인지 녹차를 만드는 사람들은 대개 구증구포 방식으로 찻잎을 덖는다고 자신의 녹차를 홍보한다. 아홉 번 찻잎을 덖고 아홉 번 말려야 제대로 된 녹차라는 설명인 것이다. 하지만 박 명인은 모든 찻잎을 구증구포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수확한 찻잎이 세면 덖고 말리는 ‘살청‘과 ’유념‘ 작업의 횟수를 늘린다는 것이다. 살청은 풀비린내를 날리는 과정으로 열을 가해서 녹차의 푸른색을 없애는 과정을 말한다. 온도는 대략 230~250도다. 유념은 찻잎을 비비면서 상처를 내는 과정이다. 이 과정을 잘 해야 좋은 차가 나온다고 박 명인은 말한다.
명인의 차는 불가 쪽에서 내려오는 제다법에 기원을 두고 있다. 고 윤보선 대통령의 사촌동생인 윤포산 스님이 칠불선원에 내려와 계셨고 윤포산 스님의 제자 중 한 분이 선친(고 박봉준)과 교우하면서 제다법을 전수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동의 찻잎은 다른 지역의 차와 다릅니다. 기온이 따뜻하고 운해가 많이 낍니다. 차나무 성장에 좋은 기후 조건을 갖췄습니다. 그리고 찻잎이 얇아서 수제로 만들기에 좋습니다.”
박 명인은 하동의 차나무는 다른 지역의 차나무와 다르다고 말한다. 기후조건도 그렇지만 역사성까지 갖추고 있다고 부연한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신라 흥덕왕 3년(828년) 사신으로 당나라를 다녀온 대렴공이 차씨를 가졌왔는데, 그 씨를 지리산에 심으라고 왕이 명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쌍계사 인근에 야생의 녹차밭이 형성되기 시작했고, 불가를 중심으로 녹차의 음용 문화가 만들어졌다고 한다. 공식 기록만 살펴도 이 땅에서 차나무가 자라기 시작한 것은 1200년 가까이 된다.
게다가 하동의 녹차는 섬진강을 끼고 있어서 차가 잘 되는 지역이라고 박 명인은 설명한다. 물을 좋아하는 차나무의 성질 덕분에 섬진강에서 자라는 하동의 녹차 품질이 좋다는 것이다.
박 명인은 녹차만 생산하는 것은 아니다. 반발효차인 ‘황차’도 생산하고 있다. 황차는 3차례 발효과정을 거친 차다. 황차의 발효과정은 ‘민황‘이라고 말한다. 우선 찻잎을 따서 3일 정도 그늘에서 건조한다. 찻잎의 수분이 자연스럽게 줄게 된다. 두번 째는 멍석에 비빈 후 베로 만든 주머니에 넣고 하룻밤 싸놓는다. 이 과정을 거치면서 찻잎은 35~36도까지 열을 내게 된다. 세번 째는 찻잎을 비벼서 다시 싸놓는데, 하룻밤이 지나면 찻잎이 빨갛게 된다고 한다. 보통 3~4일이 걸리는 민황과정을 거친 찻잎은 달큰한 홍차 맛이 난다.
김승호 편집위원 skylink999@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