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과 다른 특성 지닌 남도 보리누룩, 우리 술 전통의 일부
제주도 오메기술 이어 지리산옛술도가·온지술도가 출시
“밀이 귀한께 누룩으로 다 하면 큰일 나제. 맷돌에 드글드글해서 채 쳐갔고 히간 것은 국수하고 껍딱만 모태갔고 누룩디디제. 그러케도 암시랑토 안 하고 술은 잘 맹글어져. 그라고 밀 껍딱도 읎을 땐 보리여. 보리로 해도 똑 같은디. 사실 맛이 읎당께. 밀보다 맛이 읎는디 밀이 귀한께 엥간해선 보리로 담았제. 그란디 보리(누룩)는 먹다 보면 또 게미지제. 보리로 해갔고 발리기(법제)만 잘하면 먹을만하당께.”
남쪽 섬마을에서 보리로 누룩을 디뎠던 황옥심 씨가 아들인 지리산옛술도가 송승훈 대표에게 건넨 말이다. 맛깔난 사투리에는 보리누룩에 관한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래서 사투리를 그대로 인용했다.
밀은 귀한 곡식이었다
우선 밀은 무척 귀한 곡식이었다. 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곡물을 그대로 익혀 먹는 ‘입식(粒食)’ 문화에 살고 있다. 그런데 밀은 가루로 만들어 ‘분식(粉食)’을 만들어야 했다. 문화 코드가 맞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경쟁 작물인 보리보다 단위 면적당 수확량도 적었다.
특히 밀은 쌀과 이모작을 할 수 없었다.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이유는 밀의 수확기와 벼의 모내기 철이 거의 겹쳤기 때문이다. 파종은 보리와 비슷하게 하지만, 수확은 밀이 보리보다 10~15일 정도 늦었던 것이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했다. 밀을 수확하면 바로 모내기를 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다. 수확과 파종은 노동력이 많이 들어가는 농사일이다. 이 같은 상황을 어느 농부가 반갑게 여기겠는가.
그래서 밀은 한반도에 유입된 이래 한 번도 자급자족하지 못한 곡물로 남아 있다. 고려 때도 부족한 밀을 중국에서 수입해왔고, 지금도 밀의 자급률은 1%에 지나지 않는다.
두 번째 사실은 밀누룩을 만드는 방법이다. 지금은 통밀을 거칠게 빻아서 누룩을 만든다. 하지만 황옥심 씨의 말에선 밀가루는 따로 채 쳐서 국수를 만들고, 밀기울만으로 누룩을 디뎠다고 말하고 있다. 밀이 귀했으니 밀가루와 밀기울의 쓰임새가 각각 정해져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밀기울로 만든 누룩을 ‘섬누룩’이라고 부른다. 여기에서 ‘섬’은 바다에 있는 섬이 아니라 짚으로 만든 삿갓 모양의 누룩 틀을 뜻한다. 막걸리를 만들고 소주를 내릴 때 주로 사용한 누룩이다.
세 번째 사실은 밀이 없을 때 보리로 누룩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조선시대 밀의 주산지는 황해도와 평안남도, 그리고 강원도 지역이다. 특히 황해도의 밀을 최고로 여겼다. 음력 6월경 수확을 마친 황해도의 밀은 한양으로 밀려 들어왔다. 이때가 되면 한양에서 돈푼깨나 있는 사람들은 국수를 즐겼다고 한다. 그리고 일부는 누룩을 만들었다. 날씨도 딱 좋다. 바로 장마철이 아닌가.
이처럼 밀을 구할 수 있는 곳에선 밀누룩을 만들었지만, 벼농사를 중시했던 남부지방에선 밀누룩은 언감생심이었다. 그 덕분에 보리가 누룩의 주인공이 되었다. 보리누룩의 흔적은 아직도 남쪽에선 자주 만나게 된다. 무형유산으로 지정된 제주도의 오메기술과 진도의 진도홍주는 보리누룩으로 만든다. 이 밖에도 전남 보성의 강하주(과하주의 일종)와 영광의 토종(소주)도 보리누룩을 사용했다고 한다. 전남 담양의 양대수 추성주 명인은 “할아버지가 집에서 내렸던 추성주는 보리누룩으로 만들었다”고 기억한다. 이처럼 전라도에선 밀누룩보다 보리누룩이 더 친숙한 누룩이었다.
보리누룩의 역사
보리와 밀은 모두 서쪽에서 전해온 곡물이다. 그래서 보리와 밀을 뜻하는 한자 ‘맥(麥)’에는 ‘올래(來)’ 자가 들어 있다. 둘을 구분해서 쓰는 한자는 보리는 대맥(大麥), 밀은 소맥(小麥)이다. 보리가 먼저 들어온 곡물이기 때문이다.
중국에 보리가 유입된 것은 기원전 1세기 이전으로 추정하며 밀은 그 이후로 보고 있다. 한반도에 전해진 것은 이보다 늦은 기원후 1세기 정도로 추정한다. 이때가 되면 곰팡이를 이용한 발효 기술이 한반도에 들어와 있을 때라고 한다. 조와 기장으로 흩임 누룩을 만들어 사용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보리도 유입 이후 누룩 쓰임새가 생겼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렇다면 뒤에 들어온 밀이 보리를 제치고 누룩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무엇 때문일까. 이유는 글루텐에 있다. 한영석의 발효연구소(정읍 소재) 한영석 대표는 “보리와 밀의 차이는 글루텐에 있다. 보리를 누룩으로 만들어 쓰다가 글루텐이 풍부한 밀이 들어오면서 밀이 주인공이 된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보리는 밀이 없을 때 대체재 역할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우리 민족은 상황에 맞춰 누룩을 디뎌 술을 만들어 왔다. 그리고 요즘처럼 밀누룩이 대세를 형성한 것은 20세기 들어서의 일이다. 일제강점기 일본은 우리 쌀을 포함한 곡물을 무참히 수탈했다. 이때 부족한 식량을 채우기 위해 만주에서 조와 기장을 수입했는데, 밀도 같이 들어왔다. 밀이 흔해지니 누룩도 따라서 밀누룩이 대세가 된 것이다.
보리누룩의 특성
글루텐이 없는 보리는 성형을 위해서 수분량을 늘려서 디뎌야 한다. 그런데 수분이 많으면 누룩을 딛기가 힘들다. 안과 밖에 고르게 미생물을 모아야 하는데 수분이 많으면 누룩 안쪽에 이상 발효가 이뤄질 수 있다. 특히 보리는 수분이 빨리 마르는 특성이 있어서 밀누룩보다 크게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수분 증발을 늦출 수 있다고 고창우리술학교의 이상훈 선생은 말한다. 이처럼 보리는 누룩의 크기를 키워야 하는 데다 물까지 빨리 마르는 특성이 있어서 최적 수분량을 결정하기가 쉽지 않다고 한다.
보리누룩은 밀누룩과 결이 다른 맛을 지니고 있다. 성형하기 힘들고, 밀누룩보다 당화력이 떨어지는 단점을 가져 대체재 취급을 받아 왔지만, 보리만이 낼 수 있는 향미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앞서 인용한 황옥심 씨의 말에서 “게미지다”라는 표현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이 보리누룩의 맛을 대변하는 단어라고 볼 수 있다. 게미지다는 한번 찾는 맛이 아니라 먹을수록 계속 찾게 되는 맛을 뜻하는 전라도 사투리다.
누룩 전문가인 한국발효의 정철기 대표는 “보리누룩에서 친근한 식혜의 맛을 느낄 수 있다”고 말한다. 약간 텁텁하면서도 고소한 맛이 보리의 맛이라는 것이다. 또한 밀누룩 만큼 향기를 만들지는 않지만, 누룩취가 없는 것도 보리의 특징이라고 설명한다. 특히 보리누룩은 숙성하면 더 풍부한 향미를 만들 수 있다고 한다. “2년쯤 묵힌 보리누룩의 향은 바로 만든 누룩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라는 것. 누룩을 숙성하는 일이 익숙하지는 않지만, 묵힌 누룩은 고조리서에도 종종 등장한다며, 향온곡을 예로 들면서 “보리가 좋은 향을 내는 구성물”이라고 정 대표는 말한다. 향온곡은 여러 형태가 있지만, 대체로 밀과 녹두, 그리고 보리로 만드는 누룩이다.
보리누룩의 원형
보리누룩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곳이 있다. 제주도의 무형유산인 ‘오메기술’을 빚는 ‘술 다끄는 집(대표 강경순)’이다. ‘다끄다’는 ‘담다’의 제주도 방언이다. 쌀도 귀했고 밀도 귀했던 제주도의 전통 보리누룩을 지금도 딛고 있다. 강경순 식품명인은 오메기술과 고소리술로 처음 무형유산으로 지정된 어머니 김을정 씨로부터 누룩을 배웠다.
강 명인은 현재 연중 누룩을 띄운다. 사계절 일정하게 온도관리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지 못했던 시절에는 온습도가 높은 여름에 누룩을 디뎠다고 한다. 6월부터 9월이면 어느 집할 것 없이 누룩을 띄워 오메기술을 빚었다는 것.
보리는 다른 곡물에 비해 빨리 물러지는 특성이 있다. 그래서 누룩을 띄우면 숙성도 빨리 된다. 강 명인은 보리를 빻아 누룩틀에서 성형한 후 7일 정도 누룩방에서 숙성시킨다고 한다. 그리고 바람 불고 햇볕 나는 날 5일 정도 법제를 한 뒤 누룩으로 쓰고 있다.
강 명인이 만든 보리누룩의 특징은 홍국이다. 홍국은 모나쿠스 속의 곰팡이로 당화력이 높다. 또한 콜레스테롤 저하 등의 약성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인지 제주도에선 붉은 꽃 핀 보리누룩을 최고로 친다. “어머니 때보다 현재의 초가집에서 훨씬 홍국이 많이 내려앉는 것 같다”는 강 명인은 홍국이 많으면 훨씬 당화도 잘 되고 술도 잘 익는다고 말한다.
강 명인은 이 누룩으로 ‘오메기술’을 빚는다. 쌀이 귀했던 제주도에선 차조를 빻아서 가루로 만들어 술을 빚었다. 요즘은 쌀보다 몇 배 비싸졌지만, 그는 차조 100%를 고집하고 있다. 무형유산으로 지정된 술인 만큼 전통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제주도의 다른 양조장에서도 같은 이름의 술을 빚지만, 모두 쌀과 섞어서 술을 만들고 있다. 그래서 더 원칙을 지켜야 한다고 강 명인은 말한다.
오메기술은 단양주다. 당화력이 좋은 누룩이어서 차조를 치댄 후 누룩을 넣으면 바로 끓기 시작한다. 1주일이 지나면 술 모양새가 잡힌다. 맛도 그렇다. 새콤달콤한 녹색의 술이다. 차조 빛깔이 술에 투영된 까닭이다. 홍국이 많이 내린 누룩으로 빚으면 처음엔 붉은색 술덧이 익어간다고 한다. 다 익으면 차조의 연한 녹색으로 변하지만 말이다.
보리누룩의 가능성
‘보리술은 오뉴월이라야 제맛이 난다’는 속담이 있다. 여름에 즐겨야 보리술 맛을 제대로 볼 수 있다는 말이다. 최근 여름에 맛볼 수 있는 술 두 종이 출시됐다. 하나는 지리산옛술도가(대표 송승훈)의 ‘흑보리누룩 꽃잠’이다. 줄여서 ‘흑잠’이라고도 부른다. 지난해 처음 흑보리로 누룩을 띄어 남도의 술을 재현한 뒤 올해도 여름 한정판으로 보리누룩으로 발효시킨 꽃잠을 만들었다.
시작은 ‘맥주같은 풍미를 가진 막걸리’였다. 여름은 깔끔하고 시원한 음용감을 술의 최고 덕목으로 여기는 계절이다. 맥주 같은 막걸리는 자연스럽게 보리누룩으로 연결되었다고 한다. 결국 송 대표는 보리누룩으로 맥주의 뉘앙스를 구현하기로 하고 누룩을 띄었다. 보리는 흑보리로 선택했다. 누룩을 띄우는 대는 대략 21일 정도 시간이 걸렸다. 양조법은 밀누룩으로 만들던 ‘꽃잠’과 동일하다. 누룩만 흑보리 누룩을 넣은 것이다. 대략 열흘 동안 항아리에서 발효시킨 뒤 병입했다. 지난해 처음 출시한 보리누룩에 대한 소비자의 관심은 상상 이상이었다. 처음 보는 누룩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송 대표는 올해도 흑보리누룩으로 술을 빚었다. 이제 흑잠은 지리산옛술도가의 여름 술로 자리매김할 것으로 예상된다.
지난주 보리누룩 술이 하나 더 출시됐다. 밀누룩과 보리누룩을 비교하는 글을 오래전부터 쓰고자 했으나 보리누룩으로 만든 술이 별로 없어서 차일피일 미루다 이 술이 출시되면서 글을 쓰기로 결심했다. 소개할 수 있는 술이 3개가 되었으니 나름 지면을 구성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새로 출시된 술은 서울에 있는 온지술도가(대표 김만중)에서 만들었다. 맑은 술(주세법상 약주)이다. 술 이름은 ‘월간온지 8월호 약주’. 마치 잡지 이름 같다. 온지술도가는 단양주로 술을 빚는 곳이다. 막걸리와 청주, 그리고 소주까지 생산한다. 3종의 술 이외에 월간지처럼 매달 새로운 술을 출시하고 있다. 대도시 양조장이어서 패션에 민감한 소비자들의 취향을 최대한 반영한 술빚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번 8월호는 보리월화곡으로 만든 술이다. ‘월화곡’은 곡물가루로 디딘 누룩에 김만중 대표가 직접 붙인 이름이다. 이 밖에도 김 대표는 밀, 쌀, 녹두, 보리 등 다양한 곡물로 누룩을 빚고 있다. 각 곡물 누룩의 특성을 찾아서 원하는 술빚기에 적용하기 위해서다. 보리는 찰보리 가루로 빚었다. 김 대표는 “보리의 쌉쌀한 맛을 술에 반영하고 싶었다”고 보리 선택 이유를 설명했다.
보리월화곡은 곱게 간 찰보리 가루에 20% 정도의 물을 넣어 잘 섞어준 뒤 곱게 채로 쳐서 상자에 넣고 발효에 들어간다. 25℃를 넘지 않는 온도에서 10일 정도 발효해서 만든 누룩이다. 이 누룩은 보리의 고소한 향미를 갖고 있다고 한다. 밀가루로 만든 누룩은 바이젠 맥주의 향을 맡을 수 있다면 보리누룩은 흑맥주의 향이 난다고 두 곡물의 차이점을 설명한다.
월간온지 8월호는 단양주로 2달 동안 발효시켰다. 그리고 숙성에 6달을 썼다. 숙성기간 동안 최대한 안정화된 술맛을 뽑아내기 위함이다. 살짝 산미를 느낄 수 있고 보리의 고소한 맛이 담긴 술이다.
김승호 편집위원 skylink999@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