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의종 전국퇴직금융인협회 금융시장연구원장
국제 금융 질서의 변곡점과 스테이블코인의 부상
세계 금융은 현재 근본적 재편의 변곡점에 서 있다. 수십 년간 국제 금융 질서를 지탱해온 달러·유로·엔화 중심의 패권 체제는 블록체인과 디지털 자산의 부상으로 균열을 맞고 있다. 새로운 금융 패러다임은 단순한 기술 혁신을 넘어, 금융 주권과 국제 권력의 재배분 문제와 직결된다. 이 지각변동의 중심에 자리한 것이 바로 스테이블코인이다.
스테이블코인은 법정통화에 연동되어 가치 변동성을 최소화한 디지털 자산으로, 고위험 투기적 성격을 지닌 암호화폐와는 달리 지급 결제, 송금, 국제 무역 결제 등 실물경제에 즉각적으로 접목될 수 있는 실용성을 지닌다. 글로벌 빅테크 기업과 주요국 중앙은행이 앞다퉈 디지털 통화 인프라 구축에 나서는 것은, 스테이블코인이 단순한 금융상품을 넘어 차세대 금융 질서의 핵심 기반임을 보여준다.
미국의 경우 테더(USDT)와 유에스디코인(USDC)이 이미 글로벌 시장을 사실상 장악하고 있으며, 유럽연합은 ‘MiCA(Markets in Crypto-Assets)’ 규제를 도입해 제도적 안정성을 확보했다. 일본은 제도권 금융기관만 발행을 허용하면서 스테이블코인을 법정화폐와 동등한 지위에 올려놓았다. 중국은 더욱 과감하다. 중앙은행 디지털화폐(CBDC)인 디지털 위안화를 실험 단계에서 상용화로 끌어올리며, 국제 결제 질서의 대안을 구축하고 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한국이 뒤처진다면 금융 주권은 물론 핀테크 산업의 지속 가능성까지 위태로워질 수밖에 없다. 원화 기반 스테이블코인(K-스테이블코인)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 금융체계와 경제안보를 지탱할 핵심 전략 과제다.
K-스테이블코인의 필요성과 정책적 과제
원화 기반 스테이블코인의 필요성은 크게 세 가지 측면에서 제기된다.
첫째, 지급 결제 시스템 혁신이다. 현행 결제망은 은행–카드사–결제대행사(PG사)로 이어지는 다단계 구조로 인해 수수료와 처리 비용이 과도하다. 신용카드 결제 수수료만 연간 7조원 규모에 달한다. 블록체인 기반 스테이블코인은 실시간·저비용 결제를 가능케 해 소상공인과 소비자 모두에게 실질적 편익을 제공할 수 있다.
둘째, 금융혁신과 자본시장 경쟁력 강화다. 스테이블코인은 디파이(DeFi), 토큰증권(STO), 중앙은행 디지털화폐(CBDC) 등과 결합해 새로운 금융 생태계를 창출한다. 원화 기반 스테이블코인이 제도권에 편입된다면 해외 투자자들은 변동성이 낮은 디지털 원화를 활용할 수 있으며, 이는 원화 국제화의 교두보로 작동할 수 있다. 1997년 외환위기 당시 달러 의존이 국가 위기로 직결된 경험을 고려하면, 독자적 디지털 자산 인프라 구축은 한국 경제의 취약성을 보완하는 핵심 수단이 된다.
셋째, 통화정책과 금융 안정성 확보다. 전통적 통화정책은 현금과 은행 예금 중심으로 설계돼왔으나, 자산의 디지털화가 가속화되면서 중앙은행의 통화량 조절 기능은 점차 약화된다. 원화 기반 스테이블코인이 제도권 내에 정착할 경우, 한국은행은 디지털 자금의 흐름까지 포괄적으로 통제할 수 있어 금융 안정성 확보에 한층 유리한 위치에 설 수 있다.
그러나 기회와 동시에 난제도 존재한다.
우선, 민간 발행 모델의 위험성이다. 테라-루나 사태에서 보듯, 불투명한 민간 발행은 금융 불안을 증폭시킬 수 있다. 자본금 요건, 준비금 의무, 공시제도와 같은 제도적 장치가 반드시 병행돼야 한다.
또 규제 당국 간 정합성 부족이다. 금융위·한국은행·국세청·과기정통부 등 여러 기관이 관여하면서 규제 혼선이 불가피하다. 스테이블코인의 증권성 여부, CBDC 추진 방향 등을 둘러싼 의견 불일치는 법제화의 시급성을 더욱 부각시킨다.
아울러, 국제적 호환성 문제이다. 스테이블코인의 경쟁력은 국경 간 결제에서 발휘된다. ISO, BIS 등 국제 표준과의 정합성을 확보하지 못하면 고립은 불가피하다. FATF 권고에 부합하지 못할 경우 외국 자본의 이탈도 우려된다.
국제 경쟁 구도와 한국의 전략적 선택
스테이블코인은 더 이상 기술적 실험 단계가 아니다. 그것은 디지털 기축통화를 둘러싼 국제 경쟁의 전장이다. 중국은 디지털 위안화를 무역 결제와 공공서비스에 확산시키며 영향력을 확대하고, 미국은 달러 스테이블코인을 통해 기축통화 지위를 재강화하고 있다. 싱가포르, 브라질, 아랍에미리트 등 신흥국들도 자체 스테이블코인 프로젝트를 적극 추진하고 있다.
이러한 흐름에서 한국이 소극적 태도를 유지한다면, 금융주권은 국제 플랫폼 종속으로 전락할 위험이 크다. 원화는 기축통화가 아니기에, 국제 금융질서의 재편 과정에서 후순위로 밀릴 가능성이 더욱 높다. 따라서 지금이야말로 과감하고 체계적인 전략 수립이 요구된다.
제22회 대한금융포럼에서 논의되는 ‘K-스테이블코인’ 의제는 단순한 학술 담론을 넘어 실천적 정책 로드맵을 설계하는 계기가 돼야 한다. 정부·금융권·핀테크 업계가 함께 제도적 방향과 시장 도입 시나리오를 모색하는 과정은 한국 금융이 추격자에서 선도자로 전환할 수 있는 골든타임이다.
금융주권 수호와 신뢰의 조건
궁극적으로 스테이블코인의 성패는 신뢰(trust)에 달려 있다. 법정통화와의 1:1 교환 보장, 발행기관의 투명한 회계, 규제 당국의 엄정한 감독, 안정적 기술 인프라가 결여된다면 시장은 결코 움직이지 않는다. 신뢰 없는 스테이블코인은 모래 위의 성과 같다.
대한민국은 이미 세계 최고 수준의 IT 인프라와 핀테크 역량을 보유하고 있다. 원화 기반 스테이블코인이 제도권에 안착한다면 한국 금융은 아시아를 넘어 글로벌 금융허브로 도약할 수 있으며, 원화의 국제적 위상을 한 단계 끌어올릴 수 있다.
스테이블코인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그것은 한국 금융시스템의 안정성과 미래 경쟁력을 동시에 담보하는 열쇠다. 한국이 지금 필요한 것은 과감한 결단과 정교한 설계이며, 이를 통해 K-스테이블코인은 단순한 디지털 자산이 아닌 국가 금융주권을 지켜내는 새로운 기축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 ‘금융 강국 코리아’의 미래는 바로 이 전략적 선택에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