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병문 전국퇴직금융인협회 금융시장 연구위원

스테이블코인이 글로벌 금융질서를 재편하는 핵심축으로 부상하고 있다. 이에 따라 한국도 금융 주권 강화를 위해 원화 스테이블코인 도입 필요성이 본격적으로 거론되고 있다.

스테이블코인이란 가격 변동성을 최소화하도록 설계된 암호화폐다. 주로 미국 달러나 유로화 등 법정 화폐와 1대 1로 가치가 고정돼 있으며, 가상화폐와 법정화폐 사이의 중개자 역할을 하면서 기존 금융시장과 탈중앙화 디지털 자산을 연결하는 교량이 된다. 거래 비용이 낮고 처리 속도가 빨라 거래통화 기능을 넘어 수출입 대금 결제나 국제 송금에도 활용되고 있다.

스테이블코인은 블록체인 기술을 기반으로 하면서도 법정 통화와 연동된 안정성을 갖췄다는 점에서 특히 주목받는다. 이런 장점을 토대로 미국에서는 민간 발행 스테이블코인이 사실상 ‘디지털 달러’ 역할을 하며 달러 패권을 강화하는 수단이 되고 있다. 유럽은 스테이블코인을 제도권에 편입해 유로화의 영향력 유지에 활용하려 한다.

최근 글로벌 시장은 급격한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2024년말 기준 시장 규모는 약 2000억달러를 넘어섰으며, 2025년에는 1조달러에 이를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이런 추세 속에서 미국과 EU는 물론, 일본·싱가포르 등 아시아 국가들도 자국 통화를 기반으로 한 스테이블코인 발행을 허용하고 규제 체계를 정비하고 있다. 한국 역시 원화 스테이블코인 규율체계를 마련하기 위해 디지털자산기본법 제정을 추진 중이다.

한국 금융 시스템의 전환점

스테이블코인은 더 이상 가상자산의 한 갈래가 아니다. 국가 금융 주권과 직결된 전략적 자산이자, 글로벌 거래의 표준으로 자리 잡아가는 새로운 금융 인프라다. 단순한 결제 수단을 넘어 국제 송금, 디지털 무역, 자산 운용까지 확산되며 각국 중앙은행이 추진하는 디지털화폐(CBDC)와 맞물려 미래 금융 패권의 중심축으로 부상하고 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한국 역시 K-스테이블코인을 구축할 필요성이 커지고 있다. 이는 단순히 새로운 금융상품을 추가하는 차원이 아니라, 금융 시스템 전체의 구조적 전환을 이끌 전략적 과제다. 하지만 한국은 여전히 주요 선도국에 비해 한참 뒤처져 있다. 세계 최고 수준의 디지털 인프라와 빠른 IT 적응력을 갖추고도, 디지털 자산 분야에서는 글로벌 룰을 뒤쫓는 수준에 머물고 있는 것이다.

스테이블코인의 등장은 한국 금융에 기회이자 도전이다. 지금까지 가상자산 시장은 거래소 중심으로 급성장했지만, 제도화는 지연됐다. 원화 기반 스테이블코인 도입은 단순한 신상품이 아니라 제도적 기반을 갖춘 금융 질서 전환의 문제다. 특히 민간 발행의 실현 가능성과 공공 규제의 정합성이라는 두 과제가 동시에 놓여 있다.

민간 발행은 혁신 속도와 이용자 친화성이 장점이지만 감독 사각지대 위험이 크다. 반면 중앙은행·금융당국 주도의 공공 발행은 안정성과 신뢰성을 담보하지만, 민간의 창의성과 속도를 잃을 수 있다. 따라서 민간과 공공이 협력하는 혼합형 모델이 필요하다.

디지털 금융 강국으로 가는 길

스테이블코인의 최대 리스크는 규제 불확실성이다. 자본시장법, 은행법, 전자금융거래법 어디에도 명확히 들어맞지 않고, 국제회계기준·자본적정성 규제와의 충돌 우려도 크다. 따라서 K-스테이블코인을 제도권에 안착시키려면 규제 정합성을 확보하는 것이 최우선이다. 발행 주체, 준비금 관리, 회계 처리, 소비자 보호 장치를 명확히 하는 한편, 국제 금융 규범과의 호환성을 확보해야 한다. K-스테이블코인은 국제적으로 신뢰받는 통화 기반 디지털 자산이 돼야 하기 때문이다.

그와 관련해 윤종원 서울대 특임교수는 ‘규제의 기술 중립성’, ‘제도화 과정에서 가치 훼손 방지’, ‘전통 금융과의 공정 경쟁 보장’을 강조한다. 결국, 규제가 산업의 발목을 잡는 것이 아니라 신뢰를 보장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민관 협력 모델 구축이 필요하다. 정부는 감독과 보증에 집중하고, 제한적 실험을 통해 기술적·제도적 문제를 점검하며, 한국은행의 CBDC와 민간 스테이블코인의 병행 전략을 마련해야 한다. 동시에 G20·BIS 등 국제 논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아시아 역내 통화·결제 협력에도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K-스테이블코인은 한국 금융질서를 재편하는 분수령이다. 반도체·조선·방산이 전략산업으로 자리 잡았듯, 이제는 디지털 금융 인프라가 신성장 동력이 돼야 한다. 그러나 규제 정합성과 국제 협력 없이는 오래 버티기 어렵다. 국내 금융 인프라의 강점을 살리며 글로벌 규범과 보조를 맞출 때, K-스테이블코인은 원화의 위상을 높이고 국가 전략 자산으로 자리 잡을 수 있다. ‘규제와 협력의 균형’이야말로 한국 금융의 미래를 여는 열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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