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현경 iM증권 연구원

트럼프 2.0 행정부 출범 이후 미국에서 가상자산 제도화 속도가 한층 가속화되고 있다. 2025년 7월, 미국 하원은 ‘크립토 위크(Crypto Week)’를 공식 지정하며 가상자산 관련 핵심 입법 패키지를 통과시켰다. 이 가운데 GENIUS Act, Clarity Act, Anti-CBDC Surveillance Act 등 세 가지 법안이 핵심이다. 특히 GENIUS Act는 스테이블 코인 규율의 근간을 마련하는 법안으로, 법안 통과 이후 글로벌 시장에서 스테이블 코인에 대한 관심과 논의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현재 스테이블 코인의 주요 사용처는 DeFi 및 트레이딩(67%), 해외 송금(15%), 인플레이션 헤지(10%), 상품 결제(5%), 기타(3%)로 추산된다. 미국이 가상자산을 제도권에 편입시키자 스테이블 코인 시가총액은 2024년 초 1,300억 달러에서 2025년 8월 2,800억 달러로 두 배 이상 성장했다. 이는 단순한 투기 수요가 아니라, 글로벌 결제 인프라의 일부로 자리잡고 있다는 신호로 해석할 수 있다.

문제는 한국이다. 현재 스테이블 코인 시장의 98% 이상은 달러 기반으로 발행되고 있다. 한국의 경우 스테이블 코인 거래대금이 2024년 3분기 17조 원에서 4분기 60조 원으로 급증하며 외화 유출 우려가 커졌다. 

그 배경에는 트럼프 행정부 이후 글로벌 가상자산 매매 활성화가 있고, 국내 투자자들이 해외 가상자산 거래소를 통해 거래하면서 외화가 빠져나가는 구조가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스테이블 코인은 해외 가상자산 거래소에서 일종의 기축통화 역할을 하고 있다. 비트코인 등 가상자산을 매수하기 위해 달러(USD)보다 USDT를 더 많이 활용하여 매매를 하고 있다. 

또한 스테이블 코인은 무역 결제에서도 활용되고 있다. 현재 국내에서 일반 법인의 가상자산 법인 계좌는 허용되지 않았지만, 개인사업자나 소규모 무역업자들은 스테이블 코인을 통해 무역 대금을 송금하고 있다. 외국환거래법상 상계거래는 기재부 장관에게 신고해야 하는데, 거래가 두 건 이상이면 모두 일일이 신고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따른다. 

그러나 스테이블 코인을 사용하면 이러한 신고 절차를 우회할 수 있어 실무상 편의성이 높다. 실제로 과거에는 스테이블 코인을 통한 무역 결제가 국내 전체 무역 거래의 10%에 달한다는 추정치가 돌았으나, 기재부는 해당 수치가 과장되었다며 최대 3.4% 수준에 불과하다고 밝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테이블 코인을 활용한 무역거래가 늘어나면 국내 자본 유출이 가속화되고, 수출입 통계 및 국제수지 통계가 왜곡될 위험이 있다는 점에서 정부와 업계 모두 원화 기반 스테이블 코인의 필요성을 논의하고 있다.

하지만 원화 스테이블 코인을 발행하는 것은 생각보다 간단하지 않다. 우선 달러 대비 원화 스테이블 코인에 대한 초과수요가 크지 않기 때문이다. 미국은 세계 무역거래의 11.3%, 글로벌 GDP의 26.5%를 차지하지만 달러 결제 비중은 58%에 달한다. 즉 달러는 여전히 국제금융의 패권적 지위를 유지하고 있으며, 이는 달러 스테이블 코인의 수요를 탄탄하게 만든다. 반면 원화는 국제 결제 비중이 미미하고, 글로벌 거래에서 기축통화로 기능하지 않는다. 따라서 원화 스테이블 코인을 발행하더라도 시장의 초과수요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또한 미국과 달리 한국은 기준금리가 2.50% 수준으로 낮고 금리 인하 사이클에 들어서 있다. 미국은 높은 금리 환경을 활용해 스테이블 코인 준비금 운용에서 상당한 이자수익을 거두고 있으나, 한국은 이자차익 기반 수익모델을 그대로 적용하기 어렵다. 결국 한국에서 원화 스테이블 코인을 발행하려면 단순한 수익 창출보다는 블록체인 기반 서비스 확산을 위한 인프라 구축이라는 전략적 관점이 필요하다. 예컨대 생태계 내에서 스테이블 코인을 활용해 사용자 참여를 유도하고, DeFi, NFT, 블록체인 게임 등으로 확장하는 네트워크 효과를 노려야 한다.

그러나 스테이블 코인 제도화가 가져올 또 다른 문제는 재중개화(re-intermediation)다. 가상자산의 시초라고 볼 수 있는 비트코인은 2008년 금융위기 당시 은행과 정부라는 신뢰할 수 있는 제3자의 실패를 목격하며 등장했다. 블록체인은 은행과 정부 없이도 개인 간 직접 거래가 가능하도록 설계되어 탈중앙화라는 혁신을 가능하게 했다. 거래비용을 낮추고, 실시간 글로벌 결제가 가능해진 것도 이러한 탈중앙화 덕분이었다.

하지만 스테이블 코인이 제도권에 편입되면 발행, 보관, 거래, 모니터링 전 과정에 새로운 인가 요건과 규제가 적용된다. 이는 필연적으로 새로운 중개기관을 불러들이며, 가상자산이 지향했던 탈중앙화 특성에서 멀어지게 만든다. 더구나 라이선스 취득비용, 규제 준수비용, 커스터디 비용, 감사비용 등 추가비용이 발생하면서 거래당 한계비용이 상승한다. 

이러한 비용은 발행사의 수익성을 악화시키거나 소비자 가격에 전가될 수밖에 없다. 시장이 성숙하고 규제가 강화될수록 소규모 발행사는 평균 비용을 감당하지 못해 퇴출될 가능성이 높고, 결과적으로 시장은 규모의 경제를 이룬 테더(Tether), 서클(Circle)과 같은 글로벌 대형 발행사 중심으로 이뤄질 것이다. 

한국 정부가 금융안정성과 소비자 보호를 위해 규제를 마련하는 것은 타당하지만, 과도한 초기 규제는 혁신을 선행적으로 차단할 위험이 있다. 정부는 금융안정성과 혁신 촉진 사이에서 균형점을 찾아야 하며, 국내 발행사가 충분히 실험하고 확장할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단계적이고 유연한 규제 프레임워크를 설계해야 한다. 원화 스테이블 코인은 단순히 해외자본 유출 방지 수단이 아니라, 국내 블록체인 산업 성장의 기초 인프라로 기능할 수 있다. 따라서 단기적 리스크만을 보고 규제를 강화하기보다는 장기적으로 혁신을 촉진하고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는 방향으로 제도화 논의가 진행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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