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한 인삼과 꿀, 졸여서 만드는 ‘인삼정과’
정영석 명인, 당침과 숙성 반복하며 제작
문화로 전수되어온 전통 식품은 대체로 건강에 관련한 경우가 많다. 현대적인 의학 체계가 없었던 시절, 보양과 강장 효과를 얻기 위해 만들어 섭생한 음식이기 때문이다. 지난달 서울 북촌의 대한민국식품명인협회 식품명인체험홍보관(관장 조윤주)에서 정영석 명인의 ‘인삼정과’와 양대수 명인의 ‘추성주’ 체험행사가 있었다. 인삼정과는 약용효과를 얻기 위해 만든 한과이며, 추성주는 사찰에서 약용으로 쓰기 위해 만든 술이다. 오늘은 약성을 담고 있는 전통 음식 두 종을 독자 여러분께 소개한다. <편집자주>
“개성 갑부의 산장이라는 최신식의 2층 석조 건물에서 먹은 점심은 입에는 진미였고 눈에는 사치였다. 특별한 손님한테만 내놓는다는 홍삼 엑기스 차와 인삼정과는 식후의 나른한 식곤증을 산뜻하게 풀어 주었을 뿐 아니라 과연 개성 땅에 왔다는 감동마저 자아낼 만한 별미였다.”
박완서 작가의 소설 〈미망〉의 한 대목이다. 개성 갑부의 집에서 홍삼차와 인삼정과를 맛본 소감이 실려 있다. 〈미망〉은 일제강점기부터 한국전쟁기까지를 배경으로 삼은 소설이다. 따라서 20세기 초중반까지 우리가 얼마나 인삼을 귀하게 대접했는지 이 소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정과’는 꿀이나 조청에 과일, 뿌리채소, 약재 등을 조려 만든 저장 식품이다. 특히 ‘인삼정과’는 정과류 중에서 가장 고급 식품에 해당한다. 일제강점기에도 이렇게 귀했다면, 조선시대엔 더욱 귀히 여겼을 것이다. 따라서 궁이나 번듯한 반상가의 상차림에나 올려진 음식이라고 보면 될 듯하다.
전통 방식으로 3대째 인삼정과를 만들어온 정영석 식품명인의 체험행사가 지난달 식품명인체험홍보관에서 있었다. 전통 방식의 인삼정과는 인삼을 두어 시간 정도 시루에서 찌고, 그 인삼을 항아리에 꿀과 함께 넣어 가마솥에서 중탕하듯이 졸여서 만든다. 이때 수삼의 부피가 20~30%가 될 때까지 졸이면 정과가 완성된다. 이렇게 완성된 정과는 다시 두어 달 숙성 과정을 거치게 된다. 정 명인이 판매하는 정과는 당침과 숙성을 반복해서 만든 제품이다. 하지만 식품명인체험홍보관에서 전통 방식으로 인삼정과를 만들기는 너무 힘들다. 장비와 시간 부족 때문이다. 이에 따라 정 명인은 조림 방식으로 인삼정과 만드는 과정을 시연했다.
이날 정 명인이 선보인 인삼정과 만들기는 다음과 같다. 인삼 14뿌리(350g) 정도를 물 1.5L에 꿀 500g과 함께 넣고 졸인다. 여기서 지켜야 할 점은 중간 이후부터는 은근하게 졸여야 한다는 점이다. 또한 계속해서 물을 추가 공급해줘야 한다. 강한 불로 한 번에 끓이듯 졸이면 꿀이 충분히 인삼에 배지 않아, 딱딱한 질감의 정과가 된다. 따라서 꿀이 인삼 안에 고르게 밸 정도로 은근한 불로 졸이는 것이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한눈팔 시간도 없다. 자칫하면 인삼과 꿀이 탈 수 있기 때문이다. 대체로 4~5시간 정도 걸린다고 보면 된다. 행사에 참여한 체험객들은 2시간 정도 졸여진 정과를 집에 가져가 각자 추가 작업을 통해 완성하는 형태로 체험행사가 진행되었다.
인삼은 9월 중순부터 10월까지가 제철이다. 추석을 전후한 시기의 인삼이 가장 좋다는 뜻이기도 하다. 하지만 체험행사가 진행된 8월의 인삼은 제철보다 크기가 작았다. 게다가 기후변화로 유독 뜨거웠던 올해의 인삼은 한 달 이상 성장이 지체됐다는 것이 정 명인의 설명이다.
정영석 명인의 인삼정과는 할머니인 송자근(1910~1994) 씨로부터 배운 것이라고 한다. 하동 정씨 집안에서 만들어왔던 방식 그대로 인삼정과를 만드는 할머니를 보면서 자란 덕분에 전통 방식의 인삼정과 제조법을 익힐 수 있었다.
인삼정과가 기록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1600년대 문헌인 《영접도감의궤》다. 《영접도감의궤》는 외국의 사신을 접대하는 절차와 의식 등을 기록한 책이다. 이 책에 인삼정과가 나온다는 것은 사신단의 접대 음식 중 하나였다는 뜻이 된다. 이처럼 궁궐의 상차림이었던 인삼정과가 반상가로 넘어온 시기는 개성에서 인삼 재배에 성공한 18세기 이후일 듯하다. 이는 19세기 문헌인 《시의전서》 《아언각비》 《규합총서》에 ‘인삼정과’가 등장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해방 이후 인삼정과는 주요 인삼 산지를 중심으로 이어져 왔다. 정영석 명인의 인삼정과도 충남 금산에서 인삼 농사를 지은 덕분에 현재까지 전수되어 온 것이다.
승려들의 비상약에서 출발한 담양 ‘추성주’
체험행사는 증류 시연과 DIY추성주 만들기
추성주는 사찰에서 만들던 술이다. 사찰에서 무슨 술을 만드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절에서도 술을 만들었다. 절이 위치한 지리적 조건을 살펴보면 이해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사찰은 대체로 고도가 높은 산 속에 자리한다. 따라서 습도가 높은 계절에는 고산병과 풍토병에 노출될 수 있다. 따라서 일부 절에선 비상약처럼 증류소주를 내렸다. 양대수 식품명인의 추성주 체험행사가 지난달 말 식품명인체험관에서 있었다. 전수자인 양재창 씨와 함께 ‘증류 시연’과 ‘나만의 추성주 만들기’ 행사가 진행됐다.
추성주를 만드는 데는 약 11가지의 약재가 필요하다. 원래는 20여 가지였으나 식품공전에서 허용된 약재만 사용할 수 있어 약재의 숫자가 크게 줄었다. 이렇게 많은 약재가 들어가는 것은 추성주의 원래 목적인 약성을 얻기 위해서다. 발효는 물론 증류 과정 모두에 약재가 들어간다. 따라서 외부에서 추성주 제조 체험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체험행사는 증류 시연과 함께 시작됐다. 소줏고리에서 직접 가져온 추성주 술덧이 증류되는 동안 양 명인은 추성주에 관한 전래 내역과 제조법을 체험객들에게 설명했다.
양대수 명인은 추성주의 원래 이름은 ‘제세팔선주’라고 말한다. 전남 담양의 연동사에서 승려들의 비상약으로 만들 때 붙여진 이름이다. 증조부 시절 연동사에 큰 시주를 한 뒤 연동사 주지로부터 제세팔선주의 주방문을 전해 받아 지금은 양 명인만이 추성주를 만들고 있다. ‘추성’은 담양의 옛이름이다.
양대수 명인은 추성주(25%) 이외에 타미앙스와 죽력고 등의 술을 만들고 있다. 타미앙스는 추성주의 증류 원주라고 이해하면 된다. 알코올 도수 40%이며 숙성기간은 100일 정도 된다. 프리미엄 증류주로 생산하고 있어, 1년에 1000여 병 정도로 한정 생산하고 있다.
죽력고는 대나무의 고장답게 직접 생산한 죽력을 넣어서 만들고 있다. 양 명인이 만든 죽력의 특징은 간접 가열 방식으로 만들어 타르 등 중금속 성분이 적다는 점이다. 직화방식 제조법의 리스크를 제거하기 위해 양 명인이 직접 기계를 고안했다고 한다.
죽력은 목초액이다. 예전부터 응급할 때 사용하려고 가정상비약처럼 썼던 물질이다. 그런데 죽력을 만드는 과정이 꽤나 힘들다. 직화 방식으로 만들면 중금속은 물론 타르 성분까지 남게 된다. 따라서 양 명인은 대량으로 죽력을 추출하되, 중금속 물질을 최소화할 수 있는 간접가열방식 기계를 만들게 된다. 이 기계를 이용해 만든 죽력을 넣어 만든 술이 바로 양대수 명인의 ‘죽력고’다.
양재창 전수자는 이날 추성고을에서 새로 발표한 술 하나를 소개했다. 술 이름은 ‘푸르조’(15%)이며 딸기 리큐르다. 딸기 농축액을 넣어서 만든 술이다. 그런데 붉은색이 없다. 정밀 여과로 술의 색을 투명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양 전수자는 이 술을 크랜베리 주스와 1대1로 섞어서 얼음을 넣어 마실 것을 추천했다.
김승호 편집위원 skylink999@gmail.com